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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청년이 연 헌책방이 시민이 아끼는 ‘빅4 명물’로 진화]
[김언호의 세계 책방 기행] 국내 현존 最古 서점, 부산 영광도서
1 1968년 5월 1일에 창립한 영광도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서점이다.
주소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1동 397-55 전화 051-816-9500
그 시절 농촌 청년들에게 도시는 꿈의 세계였다. 가난한 청년들에게 도시는 새로운 기회의 공간이었다. 1966년 2월 1일, 18세 청년 김윤환은 부산으로 무작정 ‘가출’했다. 경남 함안에서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 농사일을 맡아야 했다. 형은 군대 가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버지는 농사를 몰랐다.
“부산이나 마산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교복 입은 여학생들의 하얀 칼라는 얼마나 화사한지.”
전차를 타고 번화한 대도시 부산을 배회했다. 부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다. “서면(西面) 로터리에서 ‘함안서림’이라는 간판을 발견했습니다. 이 넓고 넓은 부산에서 고향 이름을 붙인 책방이라니, 참 신기했습니다. 문 열고 들어가서 사정했습니다. 밥만 먹여달라고요.”
네댓 평짜리 작은 책방이었다. 자갈치시장에서 군용 야전침대를 사가지고 와서 책방에서 먹고 잤다. 자전거로 부산의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헌책을 수집해왔다. 이 책들을 다른 책방에 팔았다.
부산 곳곳 뒤져 자전거로 헌책 실어 날라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1950년대를 보낸 한국 사회는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우리들 삶의 한가운데에 책이 들어섰다. 4·19혁명으로 각성하는 자유와 민주주의 정신이 5·16군사 쿠데타로 한동안 주춤했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은 책과 함께 신생(新生)의 인문 세계로 뛰어들었다.
일찍이 학교를 세워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학교’로서 민족의식을 키워온 부산상고는 서면의 중심, 지금의 롯데호텔 그 곳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면 일대에는 서점 70여 곳이 문을 열고 있었다. 부산상고 담벼락에는 열 곳이 넘는 한 평짜리 서점들이, 전포동의 육군형무소 담벼락에는 서점 12곳이 줄지어 있었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이들 서점을 지탱하는 힘은 서면 일대의 수많은 학교와 학생들의 향학열이었다. 등 하교 시간 서면 일대는 교복 입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1960년대 초반 서면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학교가 끝나면 으레 교문 맞은편 서점들에 들르곤 했다. 1950년대 중 후반부터 청년들에게 시대정신을 일깨운 월간 ‘사상계’를 밑줄 그으면서 읽곤 했다. 1961년 7월호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역사적인 논설 『5·16을 어떻게 볼까』를 읽고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독서 역량으로는 만만치 않던 함석헌 선생의 『인간혁명』을 읽기도 했다.
김윤환은 함안서림에서 일한 지 2년이 조금 더 지난 1968년 5월 1일 서면에서 제일 오래된 식당 ‘급행장(急行莊)’ 앞에 자신의 헌책방을 열었다. 1.5평짜리 서점! 오늘날 연면적 1000평에 달하는 대형서점 영광도서를 설립한 날이었다.
“어머니에게 5200원을 받았습니다. 병아리 20마리를 판 돈이라고 했습니다. 2500원 주고 헌 자전거를 구입했습니다. 오전에는 동래 쪽으로, 오후에는 초량·영도 쪽으로 뛰었습니다. ‘파지’를 다른 사람보다 세 배를 주고 확보했습니다. ‘사상계’와 ‘현대문학’의 과월호도 섞여 있었습니다.”
발로 뛰고 온몸으로 달리는 서점인 김윤환은 책방 이름을 어떻게 할까 고심하기도 했다.
“우선 ‘나무’를 생각했습니다. 책은 나무로 만들지 않습니까. 집 안에 책이 있다는 것은 나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빛’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처음엔 ‘영광서림’(榮光書林)이라고 했지요. 나무와 빛이 풍성한 책의 세계라고나 할까요.”
오토바이를 사들였다. 교과서·참고서·기술서적을 싣고 이 학교 저 학교로 달렸다. 2년 만에 책방을 12평으로 확장했다.
“책방 문을 늘 열어놓았습니다. 도서실처럼 마음대로 책을 읽다가 필요하면 사가라고요. ‘영광도서전시관’이라는 고무인을 책마다 찍었습니다.”
2 카페와 강당에서 영광독서토론회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영광독서회원은 100만 명을 넘어섰다.
『별들의 고향』 등 신간 찾아 밤차로 서울행
파지에서 찾아낸 헌책들, 연필로 밑줄 친 것들을 밤새워 지우개로 지우고 깨끗하게 다듬었다.
“독자들이 늘어나고 서점 공간이 확장되면서, 독자가 찾는 책들을 갖춰놓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광에 오면 그 어떤 책도 구할 수 있게.”
1975년 신간 서점으로 전환했다. 영광서점이 대형서점으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독자가 찾는 책이 없다면 책방이 아니다.”
고향에서 중학교 졸업 이후 가출한 김윤환 대표는 독서가이자 독서운동가다.
1998년에 펴낸 에세이집 『천천히 걷는 자의 행복』에서 서점인 김윤환은 ‘독자가 찾는 책’을 구하러 매주 서울행 밤 열차를 타던 저 70년대의 고단했던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구해야 할 책들의 목록을 가슴에 안고 새벽녘에 서울역에 당도하면 찬바람이 화들짝 나를 맞아주었다. 서울역 대합실에서나 종로 지하도에서 거리의 부랑아처럼 서너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지만 비참하다는 생각보다는 투지와 사명감이 활활 타올랐다.”
그땐 유통이 요즘처럼 원활하지 못했다. 지방 서점의 설움을 견뎌야 했다. 온갖 책을 갖추고 있는 종로서적이 문을 열 때까지 그는 그렇게 기다렸다.
종로서적은 모든 책을 정가로 팔았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정가보다 10%나 15% 할인해주어야 했다. 고객이 원하는 책이라면 정가로라도 구입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영광도서는 독자들의 신뢰를 구축했다. 영광도서는 현재 45만 종, 110만 권을 갖고 있다.
신간서점으로 전환하면서 갖고 있던 헌책을 다른 책방에 팔지 않고 통영 앞바다 욕지도의 욕지중학교에 기증했다. 책 기증이 흔하지 않던 시절, 이 소식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영광도서의 존재가 알려졌다. 서점인 김윤환은 ‘나눔’이 ‘은혜’가 되어 되돌아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광도서는 지금까지 소외된 지역과 시설에 44만 권을 기증했다.
“영광도서가 처음 문을 연 곳은 지금 영광도서가 자리 잡고 있는 부산진구 서면문화로 10번지에서 70미터 떨어진 술집 많은 유흥가였습니다. 서점을 이곳에 연다고 하자 다들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술집 종업원이라고 책 읽지 말라는 법 있느냐는 생각도 했습니다.”
소설학당도 운영, 신춘문예로 14명 등단
김윤환의 생각은 옳았다. 인근의 술집 여성들이 최인호의 베스트셀러 소설 『별들의 고향』을 사러 왔다. 이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라도 서울행 밤 열차를 타야 한다고 결심했다.
2014년은 부산의 직할시 승격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 50주년을 기념해서 부산의 명물 50을 시민들이 선정하는 ‘부산기네스’ 행사가 진행되었다. 영광도서는 네 번째에 선정됐다.
부산의 대표적인 환락가였던 서면의 부전 1동은 이제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부전천의 복개를 철거하는 계획도 세워졌다. 영광도서의 앞길에는 조지훈·서정주·김춘수·노천명 시인의 시석(詩石)들이 놓였다. 시민들은 이 시석에 앉아 쉬어간다. 서점 주변으로 갤러리와 공연장·카페가 들어서고 있다. 영광도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서점이 한 지역을 문화적으로 변모시켜 나간 사례가 확인되는 현장이다.
서점이란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한밤의 별빛 같은 것이다. 부산 시민들은 영광도서가 기획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오늘도 영광도서를 찾는다.
1993년 ‘책의 해’를 맞아 시작된 ‘영광독서토론회’는 2015년 7월에 166회를 돌파했다. 작가·시인들이 평론가·독자들과 함께 토론하는 영광독서토론회는 그동안 부산에 독서 문화와 토론 문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토대를 다졌다. 신경림·이문열·김훈 등 작가와 시인들이 평론가들과 함께, 독자 앞에서, 독자들과 함께 논쟁을 하거나 토론을 해오고 있다. 일본의 나오키상 수상작가 야마모토 겐이치도 참가했다. ‘저자와의 대화’는 100회를 넘어섰다. 시 낭송회도 연다. 고전연구반·시(詩) 작법·소설학당과 한문강좌·일본어강좌·사진강좌를 연다. 독서감상문 현상공모는 26회째가 되었다. 영광소설학당에서 연찬한 문학도 14명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독서토론회에 초대되는 작가·시인·평론가에게 예우는 하지만 사례는 없다. 다른 강좌들도 지식인·학자들의 재능기부로 진행된다. 영광독서회원은 46만 명에 이르고 있다. 한 가족을 한 회원으로 치기에 사실은 100만 명이 넘는 셈이다. 연말엔 회원 1000명을 초대하는 사은행사를 한다.
1907년 문을 연 종로서적이 2002년 문을 닫았다. 저 70년대 종로서적에서 책들을 구했던 서점인 김윤환은 통탄해한다. 종로서적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안타까운 문화적 현실을.
어디 종로서적뿐인가. 17년 된 서울 한복판의 태평서적과 40년 된 대구의 제일서적이 문을 닫았다. 76년 역사의 광주 삼복서점과 52년 전통의 대전 대훈서점이, 30년 된 동보서적과 55년 된 문우당서점이 잇따라 문을 닫았다. 1997년엔 6000곳에 달하던 서점이 지금은 1500곳으로 줄어들었다. 책을 온몸으로 호흡할 수 있는 서점들,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별들이 떼 지어 추락하는 것을 우리는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다.
“우리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독서 권장은 첫째 화두요 마지막 목표”
2000년부터 김윤환 대표는 서점에서 월급을 가져가지 않는다. 직원이 75명이다. 한 해 매출이 150억 원 정도 된다. 지난해 111만 권쯤 팔았고 올해도 비슷한 수준이다. 200억원 정도는 팔아야 한다. 자기 건물이 아니면 유지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서점인 김윤환의 헌신과 실험은 계속된다. 지금의 서점 건물을 헐고 15층으로 신축할 준비를 하고 있다. 서점뿐 아니라 책과 연관되는 강연장·공연장·박물관·영화관을 넣으려 한다. 독자들의 토론방도 여럿 마련하려 한다. ‘공개념의 서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고향에서 중학교만 나오고 부산으로 뛰어왔지만, 그의 책 읽기와 공부하기는 쉼 없이 계속된다. 야간고등학교를 거쳐 방송통신대학에서 공부했다. 부산대에서 국제학 석사를 하고 동아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부산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독서권장은 내 삶의 첫째 화두요 마지막 목표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독서가다. 자신을 ‘독서기계’라고 불렀다. 그의 미래학은 사실은 독서로 이루어진 과학이다. 독서는 인간을 도덕적인 존재이자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존재로 만드는 가장 구체적인 길이다. 서점인 김윤환은 우리 시대의 독서가이자 독서운동가다. 항도 부산에 서점인 김윤환과 독립서점 영광도서가 있다.
[중앙선데이 2015-12-27 김언호의 세계 책방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