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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노포(老鋪)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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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동보서적 앞에서 봅시다." 전화로 약속 장소를 잡는데 상대편으로부터 들려 온 답이다. '옛날'이란 말에 묘한 파문이 일었다. 불과 6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현실이 살짝 당황스러웠다.

"매주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종로서적·중앙도서전시관을 돌며 책을 구입했다 '영광도서에 없는 책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 생겨났다"

태화쇼핑·동보서적·영광도서. 이 세 곳은 부산 시민들에게 있어 정서적 랜드마크였다. 적어도 서면에서는 존재 자체로 이정표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하지만 어느새 두 곳에 '옛날'이란 수식어가 붙어 버렸다. 언젠가는 이 수식어조차도 쓸모없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쯤 되니 영광도서에도 '옛날'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었다. "영광도서를 아시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 영광도서는 어떻게 기억되는지?" 부산에서 제일 큰 서점, 수험교재가 많은 곳, 약속 장소, 교과서 파는 곳….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안타깝게도 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서점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더라." 조선시대 문장가인 유한준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다. 뭘 좀 알아야 관심을 갖든지 사랑을 하든지 할 게 아닌가 싶다.

자본금 5천 원
1960년대 중반 서면의 옛 부산상고(현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자리)와 대한극장(현 CGV대한) 주변에는 40~50여 개에 이르는 책방이 있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경남 함안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한 청년이 이곳에 발을 디딘다. 가진 것도 의지할 곳도 없었던 청년은 당장의 일자리와 거처가 필요했다. 오로지 고향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함안서림'의 문을 두드린다. 숙식을 제공 받는 조건으로 서점 일을 시작한 청년은 새로운 기회를 발견한다. 당시는 서면과 보수동에 책방이 몰려 있었고, 명문 고교와 대학가 주변으로 책방이 흩어져 있었다. 새 책보다 헌책이 더 많이 유통되던 시절이다. 소위 '유통업자'로 불리던 이들이 자전거로 부산 전역을 오가며 책을 수집하고 배급하던 역할을 담당했다.
한학자인 부친한테 한자를 배우고, 중학교 때 도서부원으로 활동했던 청년은 자신의 경쟁력을 확신하고 곧바로 유통업에 뛰어 들기로 한다. 문제는 자본금. 고향집에서는 청년이 키우던 닭 일곱 마리를 판 1천800원을 포함해 5천 원을 보내왔다. 1967년, 청년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다. 이 돈은 훗날 부산 최대의 서점으로 자리 잡은 영광도서의 자본금이 된다. 그 청년이 바로 영광도서의 김윤환(61) 대표다.

한 평 반이 1천 평으로
독서량이 남달랐던 그에게는 팔릴 책과 돈이 되는 책을 고르는 '선구안'이 있었다. 그는 변두리 책방을 돌며 폐지수집상 등을 하며 영업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서면, 보수동, 동래, 영도, 대신동 등 부산 전역을 돌며 다리가 끊어지도록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6개월이 지나자 보관 장소가 필요할 정도로 책이 모였다.
김 대표는 이왕이면 유통과 더불어 직접 판매를 겸하기로 한다. 현재의 영광도서에서 70여m쯤 떨어진 도시철도 2호선 9번 출구 주변에는 당시 서면중앙시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김 대표는 이곳에 1.5평짜리 점포를 마련한다. 그리고 1968년 5월 1일 '영광서점'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자 신고를 한다. 이때부터 영광도서의 공식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1.5평이던 서점은 지금은 1천 평 규모로 성장했다.

1천 권이 42만 6천26권으로
1975년이 되자 김 대표는 본격적인 서점업 전환을 꾀한다. 이때 그에게는 유통업을 하는 동안 모은 1천여 권의 헌책이 있었다. 되팔면 적잖은 돈을 받을 수도 있었건만, 주변의 만류에도 뜻밖의 결단을 내린다. 전부를 통영의 욕지중학교에 기증하기로 한 것. 책이 귀하던 시절 이는 꽤 신선한 사건이었다. 부산일보는 사회면 기사로 보도했고, MBC 라디오는 '오후의 교차로'라는 전국 방송을 통해 소식을 전했다.
이 일을 계기로 영광도서는 본격적인 도약을 한다. 통영 출향민들이 감사의 뜻으로 책을 사러 몰려들었고, 각급 학교에서 도서 구입 문의가 이어졌다. 제비가 박씨를 물고 오듯, 책 기증이 뜻밖의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정작 놀라운 사실은 이후의 행보다. 1천 권을 시작으로 영광도서는 지금까지 총 42만 6천26권의 책을 학교와 기관에 기증했다.

46만 종 120만 권
1970년대만 하더라도 지방의 도서 보급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전문 학술서나 기술서적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김 대표는 이러한 고민을 스스로 해결하기로 한다. 매주 1회 오후 11시 20분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종로서적이나 중앙도서전시관 등을 돌며 고객들이 주문한 책을 구입했다. 언젠가 누구에게라도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주문량보다 서너 권을 더 준비했다. 종로서적 등은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던 반면, 지방 서점은 10% 할인이 관례였던 시절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이름 없는 서점 주인에게 별도의 할인 혜택을 줄 리도 만무하다. 김 대표는 장기적인 투자라 생각하며 손해를 감수했다.
시간이 지나자 고객들 사이에는 "영광도서에 없는 책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 생겨났다. 현재 영광도서는 총 46만 종, 120만 권의 도서를 보유하고 있다. 도서 종류에 있어 전국 최고 수준이다.

148회의 영광독서토론회
영광도서는 1985년부터 비정기적으로 '독자와 작가의 대화'를 개최했다. 처음 초대된 작가는 '사부님 싸부님'의 저자 이외수 씨였다. 이 행사가 1993년부터 매월 1회 '영광독서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정례화 된다. 지난 1월까지 영광독서토론회는 총 148회 개최되었고 130여 명의 작가가 다녀갔다. 이 가운데는 이문열, 신경숙, 김훈, 공지영 등 두 번 이상 다녀간 중견작가도 더러 있다.
초기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작가들의 특성상 강연회가 아닌 토론회라는 형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작가와의 만남 자체가 생소했던 독자들의 참여 또한 저조했다. 하지만 영광도서는 행사 지속을 위해 작가는 물론이고 토론자로 참석하는 평론가들까지 무보수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독자들에게는 저자 서명이 담긴 책을 추첨을 통해 증정했다.
이제 영광독서토론회는 작가의 참여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관심 또한 뜨겁다. 행사가 열리는 문화사랑방은 언제나 독자들로 가득 찬다. 전국 유일의 정기적인 토론회로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148회 토론회에 초대된 야마모토 겐이치(54)는 '리큐에게 물어라'로 제140회 나오키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다. 행사가 끝난 후 그는 "출판대국이라 자부하는 일본에서도 이처럼 지속적인 행사를 찾아볼 수 없다. 독자들의 관심이 충격적"이라는 감상을 피력했다. 이만하면 부산을 대표할 만한 문화 콘텐츠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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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은 서점다워야 한다"
2010년 2월 인터파크는 업계 최초로 부산 당일배송서비스를 실시한다. 이후 다른 인터넷 서점들까지 가세하면서 부산지역 서점업계는 더욱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영광도서는 이미 2005년부터 우체국택배를 통해 당일배송서비스를 시작했다. 서면 금싸라기 땅에다 200대 규모의 주차장을 갖추고, 갤러리, 문화사랑방, 북카페 등도 운영하고 있다.
이만하면 오프라인 서점으로 충분하다 싶은데, 정작 영광도서의 경쟁력은 따로 있다. 영광도서는 매장 직원만 60명으로 면적 대비 전국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IMF라는 위기 상황에도 인원 감축은 없었다. 책을 공급받는 거래처만 5천500여 곳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여기에는 기존 출판사는 물론이고 대학, 연구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대한출판문화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2010년 한 해 동안 책을 한 권이라도 발행한 출판사는 2천623개사에 불과하다. 품절과 절판이 아니라면 영광도서가 구하지 못할 책은 없다. 이는 모두 "서점은 서점다워야 한다"는 김윤환 대표의 고집스러운 경영 철학의 결과물이다.

43년 서점인에게 책이란?
이쯤 되니 김윤환 대표에게 '책'이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그에게 있어 책과의 인연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고향 마을의 훈장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야학을 설립해 후학을 가르쳤던 아버지의 책 사랑이 고스란히 이어졌다. 헌책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가 좋았고, 고객이 원하는 책을 구입하기 위해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열차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책이란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는 지혜의 뗏목'이라 정의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연하장이나 축의금 대신 책을 선물하고 있다. 독서 권장을 삶의 첫째 화두요 마지막 목표라 생각하는 그는, 서점인이라기보다는 독서운동가로 기억되길 원한다.


서면문화로 10번지
서면문화로 10번지는 2012년부터 사용이 의무화되는 영광도서의 새 주소다. 어쩌면 이는 영광도서의 지난 세월과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지표가 아닐까 싶다. 영광도서 주변은 예나 지금이나 음식점과 유흥업소가 즐비하다. 그럼에도 지명에 '문화'라는 단어가 붙었다. 지난 43년간 '서점다운 서점'을 만들기 위해 한길을 달려온 영광도서의 존재 덕분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책마을인 영국 웨일스의 '헤이온와이'는 1961년 옥스퍼드대를 갓 졸업한 리처드 부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세계 최대의 서점가인 도쿄의 간다(神田) 거리에는 1881년 창업한 '산세이도서점'이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먼 훗날 서면문화로에 영광도서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김윤환 대표에게 부산 시민도 100년 역사의 서점을 만날 수 있을지 물었다. "책을 쓰다듬는 일이 아버님으로부터 저에게까지 전수되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더욱 전문화된 모습으로 지속되길 바랍니다. 굳이 자식에 의해 전수되길 강변하지는 않습니다. 뜻과 의지가 통하는 이라면 훌륭하게 계승 발전시키리라 믿습니다."

이 말을 하는 김 대표의 옆에서 영광도서의 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장남 영삼(33) 씨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 속에서 자신감과 의지가 묻어난다.



[부산일보 2011.3.17 박상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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