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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감한 가족의 이야기로 형상화하는 역사의 상흔

영광도서 0 1,446

서명 : 가족어 사전 
저자 :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정가 : 13,800원 / *인터넷가: 12,420 원 (10 % 할인) 
출판사 : 돌베개 

“우리끼리는 단 한마디면 족하다 
수없이 듣고 반복했던 말 한마디, 문장 하나면 
어두운 동굴에서도, 거리의 인파 속에서도 
서로를 찾을 수 있다”

가족의 일상에서 길어올린 비밀스러운 사랑의 의미, 
야만스러운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지성과 유머, 
살아온 날들과 지나버린 시간에 부치는 이야기의 헌사 

가족의 밀어(密語)로 빚은
파시즘 시대 이탈리아 어느 유대인 일가의 초상

다감한 가족의 이야기로 형상화하는 역사의 상흔
이탈리아의 여성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소설 『가족어 사전』이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이 소설은 1963년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 스트레가 상 수상작으로,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현대의 고전’이다. 
이 책은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자전적 이야기다. 하지만 작품은 소설 형식을 띠고 있으며, 작가 역시 이 이야기가 ‘소설’로서 읽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탈리아의 가족, 친지, 친구들이 모두 실명으로 등장하고, 이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이탈리아의 현대사와 조우한다. 
작품의 배경은 무솔리니가 등장하여 파시즘이라는 독재 체제가 들어서고 인종법이 발의되어 유대인 등 소수 인종에 대한 박해가 현실화되는 시기이다. 레비 가족은 토리노에 살던 유대계로서 파시즘과 인종차별주의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파시즘은 당시 이탈리아 정치의 대세였고 다수의 이탈리아인들이 파시즘에 동조했다. 그러나 안목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파시즘의 광기를 예견하고 이에 저항했다. 작가의 아버지 주세페 레비, 오빠들, 남편 레오네 긴츠부르그와 친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역사적 사건들과 관련되는 개인적 체험을 다룬다. 즉 『가족어 사전』은 작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유년과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고백하는 자전 소설인 동시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 있었던 작가와 가족, 친지, 지인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문학적 증언이다. 

『가족어 사전』이 시대의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
현대문학은 곧 전후(戰後) 문학이라는 비평적 명제가 있다. 현대문학 가운데 탁월한 문학작품이 전후에 등장하게 되는 건 흥미로운 현상이다. 가령 1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서 ‘로스트 제너레이션’으로 불리우는 작가들이 등장하였고, 201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파트릭 모디아노는 지금껏 전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탈리아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사조가 예술의 주류를 형성한다. 이탈로 칼비노 같은 환상문학의 대가도 그 출발은 네오리얼리즘이었다. 그러나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전후의 주류 문학의 흐름에 가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으로서 경험한 일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하는데, 첫 장편소설 『도시로 가는 길』에서는 인종법으로 아브루초 지방에 남편과 아이들과 추방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의 자신들을 향한 연민과 말 없는 보살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가족어 사전』은 파시즘과 전쟁 시기의 기억을 되살려내지만 그 참혹한 현장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대신에, 그 어려운 시절에도 계속되는 가족의 일상을 하나하나 기억하여 불러낸다. 공식적인 역사가 기록할 수 없는 일상의 세목들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이지, 역사가 기억하는 사건이 바로 인생이 될 수는 없다. 이 책이 실재했던 일들을 썼다고 하지만, 굳이 소설로 읽혀야 한다고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역사는 개별적 삶을 기록하지 않는다. 다만 문학만이 개인의 삶을 기억할 수 있다. 공식 역사가 공동체의 기억을 다루지만 그 누구의 인생도 담고 있지 않다면, 『가족어 사전』은 매일 반복되는 가족의 일상에 대한 기억을 통해 그 시대의 진실에 접근한다. 문제는 허구이냐 실제이냐가 아니라, 역사와 시대를 말하는 데 있어 어떤 방식이 더 진실하냐이다. 

‘가족의 밀어’로 빚은 가족의 이야기 
책의 원제 『Lessico famigliare』에서 ‘lessico’의 본래 의미는 ‘사전’인데, 이 책에서는 가족이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그들끼리만 통하는 말, 즉 ‘밀어’(密語)를 함축한다. 작가는 가족이 쓰는 사적인 밀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가족의 일상을 형상화한다. 성격이 괴팍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아버지 주세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나 가족들에게 ‘당나귀’, ‘니그로’, ‘얼간이’, ‘살라미 소시지’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권위적인 성격이 드러나지만 동시에 미워하기 어려운 인간적 면모가 부각된다.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적이었던 오빠 마리오가 어릴 때 즐겨한 말장난 “일 바코 델 칼로 델 말로. 일 베코 델 켈로 델 멜로. 일 비코 델 킬로 델 밀로”(‘일 부코 델 쿨로 델 물로’[노새 똥구멍]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모음을 바꿔서 말을 만드는 게임)는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유년의 뜰’로 독자를 데려간다. 오빠 알베르토가 지은 시 “가슴도 없는/ 노처녀가/ 한없이 사랑스러운/ 아기를 낳았네”는 레비 가족의 지적인 자유분방함과 문화적 감수성을 짐작하게 한다. 
레비 가족의 밀어는 오직 레비 가족만이 알 수 있다. 그 밀어가 ‘가족의 감정적 기반’을 이루고 가족의 정체성을 만든다. 그리하여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바쁜 형제들을 다시 5남매가 함께 살았던 시간으로 되돌려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 반복하여 썼던 말들이다. 작가는 가족의 밀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끼는 단 한마디면 족하다. 단 한마디, 한 문장, 우리의 어린 시절에 수도 없이 듣고 반복했던 그 오래된 말 한마디면 우리들의 옛날 관계를 단숨에 되찾는다. (……) 이런 문장 하나 혹은 이런 말 중의 하나는 우리 형제들이 어두운 동굴 속이나 수백만의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서로를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들의 라틴어였고 지나간 날들의 사전이었으며 이집트 혹은 아시리아-바빌로니아의 상형문자, 존재하기를 멈추었지만 난폭한 물살과 시간의 부식 속에서 살아남은 생명세포들과 같은 것이다.”(36~37쪽) 
가족의 밀어를 통해 레비 가족의 이야기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개성이 되면서, 한편으로 이 세상 여느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살아온 날들과 지나버린 시간에 부치는 이야기의 헌사
아버지 주세페 레비는 권위적이고 괴팍하지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내 리디아에게 자식들 걱정을 토로한다. (“알베르토 때문에 걱정이야!” 아버지는 한밤중에 눈이 떠지면 이렇게 말했다. “군사재판에 회부될 정도라면 정말 장난이 아니었을 거야!”―147쪽) 그리고 파시즘에 반대하고 반파시스트 투쟁가를 신뢰하여, 오빠들이 체포되어 투옥되는 상황에서 그들을 자랑스러워한다. 
어머니 리디아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사랑하며 집 안에서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낙천적이고 유쾌하며,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는 포용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아버지 주세페와 어머니 리디아 덕분에 파시즘 시대를 살아가는 레비 가족은 일상에서 지성과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마리오와 알베르토는 청소년기에 반항적이고 자주 말썽을 피워 아버지에게 ‘당나귀’라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지만, 청년기에 들어서는 파시즘에 맞서 결연히 투쟁한다. 반파시스트 투쟁가 친구들의 면면도 화려한데, 알베르트의 친구 잔카를로 파예타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주요 멤버이고 비토리아 포아는 전후 이탈리아의 주요한 정치인이 된다. 
작가의 남편 레오네 긴츠부르그 역시 유명한 반파시스트 투쟁가로서, 줄리오 에이나우디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에이나우디 출판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레오네의 친구 체사레 파베세는 전후 이탈리아의 가장 중요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전쟁 시기에 작가에게 일어나는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남편 레오네의 죽음이다. 그러나 작가는 남편과의 유형지에서의 생활과, 투옥과 고문으로 인한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 극적이기보다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자신에게 일어난 운명을 받아들이고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은 레비 가족의 유쾌함과 낙천성, 그로부터 말미암는 보살핌과 사랑 덕택이었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가족의 일상, 그 일상에서의 가족 간의 교류가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책은 나탈리아의 인생을 만든 사람들, 그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린 고인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한 여성의 기나긴 자기 탐색의 여정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과거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손을 다시 잡을 수는 없지만, 작가의 기억과 글쓰기는 이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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