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5047

부끄러움에 대한 작은 보고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경북 경산시 옥곡동 21번지 경산여자고등학교 교사 김현주

 

 

“에이, 뭐야. 조금만 더 열심히 하지. 그랬으면 금메달 땄을 텐데. 메달 경쟁에도 끼지 못한 은메달, 그거 따서 뭣해.” 이러고는 채널을 돌리려다 고개 숙인 선수를 다시 보게 된다. 실망한 표정, 허탈감, 혹은 좌절감이라 표현해도 좋을 비감이 담긴 얼굴. 왜 억울하지 않겠는가. 금메달만을 좋아하는 나라에서, 최고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나라에서, 정상에 서기 위해 오늘까지 그가 기울인 노력이 얼마이겠는가. 


우리처럼 엘리트 체육이 특히 강조되는 나라에서, 학창 시절 내내 교실 한번 안 들어가고 땡볕에서 혹은 체육관에서 흘린 그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얼마이겠는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진지한 표정까지 곁들여 말들은 하면서도 우리가 얼마나 결과만을 평가의 잣대로 삼아 왔기에 37억 아시아인 중 특정 부문에서 두 번 째로 잘하는 위대하고도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평가되는 순간, 그는 슬픔과 좌절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가.


모를 일이다. 삶은, 혹은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바르게 산다는 건 또 어떤 것인가. 억조의 인간들이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머리를 짜내어 만들어 놓은 삶의 진리들이, 그렇게 멋있는 말들로 교과서를 장식하고 있는 가치로운 삶의 자세들이, 그러나 세상에서는 왜 지켜지지 않는가. 


질서는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아이에게 가르치고는 그 애 손을 잡고 눈치보며 무단 횡단하는 부모들, 신호를 위반해서 벌금 고지서를 받고는 반성보다는 운수와 사나운 일진을 탓하는 우리에게 과연 정도란 있는가. 아는 게 힘인가 아니면 모르는 게 약인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믿고 밀어붙여야 하나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 말라’는 신중론에 따라 처신해야 하나, ‘대기만성’이라는 말로 아들을 위로하고는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며 아내와 걱정하는 나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나. 


그냥 열심히 직분에 충실하는 척하며, 그 한 방법으로 적당히 사회와 타협하며 밥그릇을 지키고 사는 게 최선인가. 한 주일 내내 세상의 의롭지 못한 것들에 적극적으로 몸을 던지고는 주일 고백성사 한번으로 내 몸이 깨끗해졌으려니 위로하며 사는 게 바른 인생인가, 모를 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참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읽었다. 철없이, 서른도 중반을 넘긴 나이에 ‘삶이 무엇인가’고민하는 월급쟁이가, 오랜만에 아주 재미있는 책을 한 권 읽었다. 소문에 현혹돼 읽은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책장을 넘기며 ‘뭐 이런 게 다 있어’라던 무지한 독자의 성급한 혹평(酷評)은 책을 덮으며 ‘아, 이런 책이 있을 수도 있구나’는 가평(嘉評)으로 바뀌었다.


과장되고 더러는 개연성이 의심스러운 엉뚱한 소재로 웃음을 만들지만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과는 달리 허허로운 속된 웃음으로 끝내지 않고 통쾌한 비판과 삶의 진실을 담은 이 책은 분명 다른 소설들과는 구별되는 유별난 점이 있었다. 과거 신분 사회에서 일상의 억눌린 울화를 판소리 한 구절의 해학으로 웃어 풀어내던 선인들의 웃음이 혹시 이런 것이 아닐까. 


그 전통의 건강한 웃음에서 한 단계 나아가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웃게 만들어 놓고는, ‘너는 지금 웃고 있니?’하며 일침을 놓는다. 그 작가의 의도에 나는, 혹은 우리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놀라고,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돌아본 내 삶의 궤적에 가슴을 떨게 만들며, 나아가 ‘자, 이제는 힘내서 잘 한번 살아보자’는 격려까지 하고 있으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통한 작가 성석제와의 만남은 아마 의식에 오래 각인될 듯하다.

분명 지어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개연성 때문일 게다. 현실을 옮겨 놓은 듯한 배경과 내 주변에 있을 법한, 혹은 내 이야기인 듯 듯한 등장인물의 삶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알기도 하고, 반성하거나 위로를 받기도 하며, 나아가 다시 추슬러 내일을 다짐하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이지 않겠나. 그런데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다르다. 우선 등장인물이 그렇다. 


평생 동안 죽어라 일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웃의 굳은 일을 도맡아 하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약속을 지키다 사고로 죽은 ‘황만근’,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불행한 삶을 자기 탓만 하며 사는 <천애윤락>의 ‘동환’, 잡다하고 사소한 법규의 위반으로 대부분 전과자인 <쾌활 냇가의 명랑한 곗날>의 ‘상호 친목 계원들’, 집 부피를 초과할 만큼 오직 책 수집에 탐닉하는 <책>의 주인공 ‘당숙’, 유별난 출생과 성장 배경을 가졌으나 천하의 미남으로 성장해 향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남가이’, <욕탕의 여인들>에서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해 한번 잘 살아 보려는 ‘나’, 첫판의 도박은 어떤 종류를 불구하고 이기고 마는 <꽃의 피 피의 꽃>의 ‘나’. 그 누구도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모두들 세상이 규정해 놓은 바른 길에서는 비켜선 삶을 사는 인물들이다. 그런 만큼 이들의 행적 또한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함 그 자체이다. 삼류 통속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기이한 인물들이 그려내는 엉뚱한 삶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며 우리는 웃는다.


그런데 그것이 가벼운 웃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 깊이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개그를 보는 것처럼, 그냥 웃고 넘어가고 잊어버리지 못하는지. 어쩌면 이들이 보통의 삶을 살지 못한 비극적인 인물이어서일 듯하다. 아니, 더 솔직히 털어놓으면 우리가 이들을 비극적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는 자책감 때문이지 않을까. 경운기 시위에 황만근만 경운기를 몰고 가 연락이 없는데, 모든 궂은일은 그에게 다 시켜 놓고도 고마워 할 줄 모르던 이장은, ‘만그인지 반그인지 그 바보 자석 하나 때문에 소여물도 못하러 가고 이기 뭐라. 스무 바리나 되는 소가 한꺼분에 밥 굶는 기 중요한가. 


바보 자석 하나가 어데 가서 술 처먹고 집에 안 오는 기 중요한가. 써그랄.’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되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으면서도, 그이유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인 동환에게 ‘나’는 , ‘등신, 쪼다, 친구 개망신시키는 놈, 걘 구제 불능이야. 어떻게 해도 안돼’라며 짐승 쳐다보듯 한다. 


천덕꾸러기로 태어나 천덕꾸러기로 자라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남으로 살게 된 ‘남가이’는, 그러나 결국 결혼도 못하고 홀로 인분 웅덩이 옆에서 죽는다. 우리 중 누가, 나는 ‘이장’과 다르다, 말할 수 있겠나. 결국 이들을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 건 바로 ‘우리’인 것을.


혹시 그들을 향해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으로 정상적으로 살지. 왜’라며 손가락질 할 수 있나. 그러면 우리는 굴레를 벗을 수 있는가. 아니다. ‘보통, 상식, 정상’이런 것들은 누가 만들어 놓았나. 어느 게 보통이고, 어느 게 상식이고, 어느 게 정상이란 말인가. 어쩌면 ‘정도’란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이 서로 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의 합의 하에 그어 놓은 모순적인 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선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얼마나 바르게 살든, 도리를 다하든 상관없이 비정상으로 매도해 버리는 우리. 사실 우리에 비해 오히려 순수하고 정겨운 그들은 포용의 대상이자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작가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그는 희극적으로 비극적 삶을 다소 과장되게 그리면서, 우리의 웃음을 온전히 비판하고 있다.


끔찍하게 욕망과 이기심에 비뚤어진 세상을 향해 비수를 던지면서 어떤 게 진실인지 아느냐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아느냐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많이 부끄러웠다. 세상에 드러낼 아무 자랑거리도 없으면서 아시안게임의 은메달 리스트에게 조소를 보내는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가치로움에 대해 알기나 한 건가. 컴퓨터 하는 아들 녀석에게 책 읽어라 과제를 내고는 컴퓨터 앞에서 주식 시세나 확인하는 뻔뻔스러움은 ‘황만근’을 죽게 만든 이장과 뭐가 다른가. 빠듯한 살림에 정작 자기는 양말 한 켤레도 주저할 수 밖에 없는 아내에게, 뭐 하느라 생활비 떨어졌느냐, 큰소리치는 나는 모든 상황을 멋대로 설정해 남편을 결국 유치장에 가둔 <천애윤락>의 동환의 아내보다 나은 게 있나. 부끄럽다. 참 부끄럽다.


미안한 마음에 오늘은 서둘러 퇴근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터이다. 이 부끄러움이 단순히 가족을 위한 한번의 행사나 노력봉사로 지워질 게 아니라는 건 잘 안다. 아울러 책 한 권 읽고는 당장 열심히 살아야지 결심하고 실천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안다. 


더욱이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게 바른 삶인가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이젠 좀 잘 살아보고자 한다. 우선 애들에게, 그리고 안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볼 작정이다. 애들 앞에서라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부끄러운 짓은 이제 그만 해야지. 


그러잖아도 박봉에 살림 사느라 찌든 아내 마음에 못은 박지 말아야지 결심해 본다. 비록 황만근씨처럼 말 없이 도리를 다하는 삶은 안 되더라도 최소한 그런 사람을 비극적인 인물로 만드는 잘못은 범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오래도록 황만근 씨가 기억될 것 같다. 그가 오래 나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반추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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