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5866

 

<빛>을 읽고

                                                                                                 부산시 남구 문현1동 김해인

 

  

 

내가 진정으로 따르는 신앙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 톨스토이

 

어렸을 적부터 나는 죽음을 너무나도 두려워했다. 고작 열 살짜리 꼬마 여자애가 혼잣말로 죽고 싶지 않다며 방 한구석에서 울먹거린 적도 있다. 이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이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마치 나 혼자만의 비밀이었고, 그렇게 혼자 끙끙대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되었다. 어린 내가 느꼈던 순수한 공포는 예전처럼 문이 쉽게 열려 밖으로 분출되는 일은 없지만, 아직도 마음의 어느 방 한 켠에 뿌리 깊게 들어앉아있다.

 

넉넉지 않는 살림 때문에 일주일 내내 미용실 문을 열어둬야 했던 엄마는 단지 공짜라는 이유로 동네 교회에서 하는 여름 캠프에 나를 보낸 적이 있다. 무교인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접했고 그 후로도 종종 교회를 찾았다. 나에게 ‘천국’이란 단어는 구세주처럼 들렸다. ‘믿음은 유혹이에요‘라고 단호히 말한 경태처럼 천국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내 마음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어두컴컴한 죽음의 방을 말끔하고 깨끗하게 치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유혹은 내 마음에 스며들지 못하고 벽에 부딪혀 자꾸 튕겨져 나갔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과연 천국에서 행복할까?’

 

근심, 걱정이 없고 기쁨만이 가득한 세상은 과연 행복한 세계 일까. 빛은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라 말할 수 있듯이, 슬픔이 존재해야 기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천국이 행복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죽음과 다름없는 상태라고 본다.

 

천국과 같은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하면서 하느님께 이런 말을 듣는다.

 

“내가 일찍이 일러둔 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 가리라.”(창세기 3:17-19)

 

나는 이 성경 구절을 읽으며 먼지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가는 인간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짠하게 느껴졌다. 인간은 죄를 짓기도 하고, 실수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반성을 하고 뉘우치는 순간, 그 먼지는 하나의 커다란 우주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하느님보다 먼지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는 먼지인 동시에 하나의 우주가 될 수도 있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존재하고, 어둠이 있기에 빛이 존재하고, 죄를 짓기에 구원을 받는다.

 

빛에 등장하는 경태 역시 말한다. 왜 죄를 미워하는가. 죄가 없으면 그 좋은 구원도 없다. 오히려 죄는 인생을 더 깊이 통찰하게 하는 값진 스승이 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예수보다 힘껏 똥을 누는 예수를 통해 인생의 진리를 배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에 등장하는 부처님을 통해서도 그렇다. 그는 재미난 게 없을까 하고 연못가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며,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인간처럼 그려지고 있다. 호기심에 가득 차 지옥에 있는 죄인에게 장난을 치는 부처님, 힘껏 똥을 누는 예수를 통해서 나는 삶의 소중함과 인간이 지니고 있는 흠이 오히려 빛날 수 있음을 느낀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삶과 죽음은 따로 떨어져있는 별개의 것이 아닌, 마치 동전 앞면이 삶이고 뒷면이 죽음인 것처럼 하나의 것이며, 인생은,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에 찬란하고 아름다워진다. 애니메이션 ‘게드전기’에 나오는 마녀는 단순히 악하기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녀는 죽음이 두려운 겁쟁이였고, 그 두려움을 마법으로만 감추려다 보니 자신 밖에 모르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비록 겉으론 강인한 존재일지 모르나, 반대로 주인공 소년은 죽음을 인정하고 삶을 소중히 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건하고도 강인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완벽하고 절대적인 존재’를 추구하기보다, 우리가 짓고 있는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사랑한다면 그 순간에 우리는 예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삶을 감사히 여기는 마음을 늘 가지려 노력해도 사라지기 쉽다. 하지만, 죽음을 인정하고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삶을 즐긴다면,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에서도 신을 만나고, 끊임없이 자신을 보듬어주는 엄마의 품속에서도 신을 만나며, 산책을 나갈 때면 졸졸 따라다니는 귀여운 강아지의 눈망울에서도 신을 만난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예수는 저 높은 하늘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 삶 속 곳곳에 스며들 수 있는 예수가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할 종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 김곰치와 같이 나도 외치고 싶다.

‘예수야, 친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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