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288

 

나는 지금 예쁜가요? -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고

                                                                                                   사하구 장림2동 하나름

 

 

 

길을 걷다가, 혹은 앉아 있다가 문득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갑자기 떨어지는 잎에, 햇살이 쏟아져 물그림자가 흔들거리는 물웅덩이에, 신호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맞은편에 선 친구의 모습에 아무 이유도 없이 마음이 알싸해져 오는 것이다. 그 느낌은 마치 나 혼자 이 땅 위에 선 듯 외롭고 괴로우면서도, 무언가가 살을 맞대오듯 따뜻하다. 그리고 그런 순간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너무도 강렬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힌다. 참 우습게도.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엄마에게 했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나도 네 나이엔 그랬지’라고 하셨다. 조금 퉁명스러웠던 목소리 톤에 ‘아직 어리구만-’하는 비웃음 같은 것이 묻어 있어서 살짝 속이 상했는데, ‘나도 아직 소녀의 마음이 남아 있다’고 덧붙이시는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참 유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속 한 구석에 소중하게 그 순간을 간직하고 있는 엄마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아직 그 마음을 다 알 수는 없는 나는, 지금 스물 셋이다. 

 

스물 셋이라 하면 아직 어려서, 제일 예쁠 때라는 걸 모르고 있다고 어른들은 혀를 차신다. 하지만 나도 그렇고, 내 또래들도 그렇지만 그걸 왜 모르겠는가. 직감적으로든, 교육을 받은 결과이든 다들 알고 있다. 이십대 초반인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싱그럽고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때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치 나침반은 손에 있지만 갈 곳을 모르는 사람처럼,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지, 정작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해 우왕좌왕 할 뿐인 것이다. 

 

이렇게 방황하는 우리가 불쌍해 보이는지 답답한 건지, 20대에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는 책들이 수없이 서점의 가판대 위에 널려 있다. 그리고 방황하는 20대가 많긴 많은지 그런 책들 중의 몇몇은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몇 달이나 내려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비뚤어 진걸까? 그런 책들, 이른바 ‘성공서’에는 손이 잘 가지 않고, 때때로 불편함까지 느낀다. 그 책들이 말하는 젊은 날의 패기라든지 성실이라든지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그래야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은 채 내 엉덩이를 걷어차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든 열쇠가 내 손에 있다는 건 알지만 어떤 문을 열어보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혹시 열쇠가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다. 다만 그럴 뿐인데, 성공서들은 ‘네가 다 가지고 있는데 뭘 망설이냐’며 나를 채근한다. 누가 가진 걸 몰라서 이러고 있나, 고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온다. 이쯤 되면 화가 난다. 내가 고민한 시간들이 불성실의 극치로 매도당하는 것만 같다. 설령 내가 빙빙 돌아 도착한 방황의 끝이 성공서들의 결론과 똑같다고 하더라도 ‘지금 네가 시키는 대로는 안 해’같은 땡고집이 생긴다. 

 

이런 나인지라,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책 제목을 봤을 때도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 보나마나 스무 살이 가장 예쁘다고 하는 거겠지 싶었기 때문이다. 이십대를 살아가는 나는 그 예쁘다는 말이 성공서들의 ‘네가 다 가지고 있는데 뭘 망설이냐’와 똑같은 폭력으로 느껴질 때가 가끔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꺼림칙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책을 샀다. 소설이라는 장르와, 공선옥이라는 작가님의 이름 때문이었다. 나는 스무 살의 이야기이면서도 그 스무 살에 무언가 당위성을 갖다 붙이지 않는 이야기를 너무나 읽고 싶었고, 공선옥 작가님의 소설이라면 이런 내 바람을 이뤄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책장을 넘겼다. 

소설 속에 나오는 해금이를 비롯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나이면서, 내 친구들의 모습을 조금씩 섞어 놓은 것이었다. 비록 해금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기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소설이 그 시대적 배경 자체에 중점을 두지 않은 바, 나도 아무런 이질감 없이 해금이와 그 친구들 속에 섞여 들어갈 수 있었고 덕분에 마음껏 울고 가슴 떨려할 수 있었다. 그들의 스무 살과, 나의 스무 살에 대하여 말이다. 

 

해금이와 그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 어떤 시대라도 스무 살은 치열한 것 같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치열한 것이 아니라, 그냥 치열하다. 아무 것도 모르니까, 왜 두려운지 왜 아파야 하는지 모르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겪어내야 한다. 한숨을 쉬거나 혀를 찰 여유도 없이, 살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요령도 부릴 줄을 모르고 그저 세상을 겪는다. 한편으론 꼴사납지만 참으로 치열하다. 만약 그런 모습이 한심하다거나 불성실하다고 말해야만 한다면, 도대체 멋짐과 성실함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아프지 않은 것에? 세상이 제 발 아래 있다는 자기만족에?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있는 힘껏 꼴사납게 뒹굴고 싶다. 수경이처럼 ‘세상을 도저히 알 수 없음’에 절망하고 꺾여 버릴 정도로 흔들렸으면 좋겠다. 알 수 없는 아픔을, 고통을, 성실하다든지 멋지다는 말로 덮어 버리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너무도 간단해서 힘이 쑥 빠져버릴 것만 같으니까. 복잡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살고 있지만, 그래도 힘겹게 내딛는 발걸음에, 내가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났지만 아등거리다 보니 세상의 하나하나가 내게 아로새겨졌다. 애초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존재가 이만큼이나 만들어지다니, 참 신기하고 놀라운 일 아닌가. 

 

이 소설은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는다. 스무 살이 아름답다는 것도 작가의 말에서 나오는 것이지, 소설 속의 어떤 문장에도 쓰여 있지 않다.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 가다 보면 스무 살을 살아가는 해금이와 친구들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눈이 젖어들곤 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나이를 살아가는 내가, 몹시도 사랑스러워졌다. 어떤 결말도 지어지지 않아 계속 두려워하고 헤매겠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내가 자랑스러워서 말이다. 무조건 두려움을 극복하겠다거나, 성공하겠다거나 하는 목적의식에 불타오르기보다는, 지금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세상의 하나하나가 내게 아로새겨지고, 내가 새겨진 무늬 하나하나를 다시 들여다 볼 때 내 나름대로의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게 돌아가는 길이라도, 혹은 막다른 길이라도 좋다. 아름다운 이십대를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하며 있는 힘껏 흔들렸으면 좋겠다. 

이런 나는 지금 예쁜가요? 

지금 밤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에 또 마음이 알싸해지는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에 또 눈물이 나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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