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6555
  "좌절" 를 읽고

 
난감하다. 당당한 기세로 달려드는 파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 한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처럼. 남은 것은 하얀 물보라뿐. 내 두 손에, 내 두 눈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뒤이어 달려오는 파도는 앞서 사라진 파도를 기억할까? 다르면서도 같은, 같으면서도 다른 본질.

내 열 손가락이 책, <좌절>을 꽉 쥐고 있다. 이미 책을 다 읽은 뒤이건만 손가락에 힘을 주어 놓치지 않으려해도 마치 안개를 붙잡으려 하는 것만 같다. 책을 펼치기 전 보다 더 모를 일이다. 아니 알게 되었지만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난 좌절을 표현하려 한다. 어느 한 인생의 좌절을. 하지만 물밀 듯 내 손 끝으로 몰려 드는 것은 바로 나의 좌절이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인생이 이렇게 거대할줄이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훔쳐보기 좋아한다. 때문에 현실이든 허구이든 수 없이 스쳐 지나가는 인생을 훔쳐보고 즐거워한다. 그게 바로 세상 사는 맛이라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알고 있다. 결코 세상 사는 맛이 달콤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 인생은 사실 씁쓸하다는 것을. 다만 숨기려고 할 뿐이다.

나는 한 노인을 읽었다. 그리고 그 노인을 가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노인의 인생은 운명이라는 날줄과 의지라는 씨줄로 엮어진 끝없는 그물이었다. 그 속에서 노인은 원치 않는 좌절을 낚아야만 했다. 피할 수 없는, 그럴 수밖에 없는.

노인은 갈구하였다. 글쓰기를. 작가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노인은 꼭 쓰려고 했다. 그리고 노인은 소설을 완성했다. 노인은 자신의 일생을, 소설을 세상에 드러내 놓기를 원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걸 바라지 않았다. ‘소설의 걸출함을 모두 우연으로, 새롭게 시도된 요소를 무능력으로, 전체적인 결과를 탈선으로 보았기 때문에’노인의 소설은 다시 노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좌절로.

노인은 파도처럼 왔다가 사라지곤 다시 나타난다. 본질은 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같은 모습으로. 쾨베시가 씨클러이, 베르크와 다르지만 사실은 같은 것처럼. 고국으로 돌아온 쾨베시는 자신의 삶을 뿌연 안개 속에서 시작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닥쳐오는 현상에 그저 부딪칠 뿐이다. 해고된 기자 자리, 철강 공장의 노동자, 정부 부처의 사무원, 군대 감옥 간수자리, 신문사 칼럼니스트, 그가 원하지 않았지만 그에게 선택된 자리들. 결코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자리들. 자기의 위치에 맞게 행동을 하고 그가 선택한 것을 책임지고 완수하나 그렇게 해도 모든 일에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신은 적합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결국 좌절은 특별한 동기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평범한 사실, 사소한 문제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다. 씨클러이는 쾨베시에게 희곡을 쓰라고 부추긴다. 곧 쾨베시가 글을 써야만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 적합한지에 의문을 품던 쾨베시는 베르크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글을 읽게 된다. ‘글쓰기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임을 호소하는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운명이 세상을 향해 ‘멋지게 복수’할 수 있는 일임을 이해한다. 하지만 쾨베시는 지나친 글쓰기의 열망으로 치닫게 되는 두려움 또한 베르크에게서 발견한다. 그럼에도 쾨베시는 결국 글쓰기를 선택한다. 이전의 삶은 운명이 자신을 선택하였지만 이젠 쾨베시 자신이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쾨베시는 글을 써서 소설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 소설은 노인에게 좌절로 돌아온다. 좌절은 희망의 빛이 희미해져 갈 때 다가온다. 동시에 희미하긴 해도 희망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좌절이다.

세상이 인생에 던지는 좌절은 다 똑 같은 것일까? 사랑에서 오는 좌절, 일의 성취와 실패에서 오는 좌절, 갑자기 닥쳐온 재해로 인한 좌절 등등. 원인은 다 틀리겠지만 결국 좌절의 본질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노인은 좌절을 품에 안아야 했다. 하지만 품에 안은 좌절을 다시 놓아 줌으로 세상을 이겼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태풍 매미로 많은 수재민들이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온 국민이 보여 줌으로써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었다.

내가 임레 케르테스의 좌절을 열 손가락으로 꽉 붙잡고 있지만 결국 내가 잡고 있는 것은 나의 좌절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적합한 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난 아직 나의 적합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렇긴 해도 한 노인의 거대한 인생이 내게 파도처럼 덮쳐와 나의 좌절을 조금씩 씻겨 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젠가 나 역시 나의 적합한 자리를 찾게 되리라. ‘감히’라는 감정으로 뜨겁게 밀어 내치는 지금 이 순간 난 노인의 좌절이 승리 했음을 종이 위로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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