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5233

사랑과 죽음

<상속>를 읽고

창원 경일고등학교 1학년 김민지

 

 

일요일 아침 11시. 늘어지게 단잠을 자고 난 뒤라, 커튼을 젖히자마자 쏟아지는 가을의 금빛 햇살이 영 따사롭게 느껴지는 게 아니다. 이불을 대충 개켜 놓고, 거실로 나간다. 식구들은 어디 산책이라도 하러 나간건지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내 발자국 소리만 쿵쿵 울린다. 거실의 큰 창에 이르러서 나는 얼떨결에 창 너머의 빨간 대야 안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우리 집 개 망치와 눈이 마주쳤다. 

 

망치는 아주 행복해 보인다. 엊그제, 출산을 했는데 새끼를 네 마리나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망치의 품속에서 새끼는 죽어있다. 아직 눈도 못 뜬 것들이 팔다리를 하늘로 향해선 마치 자는 듯 죽어 있다. 처음에 나는 새끼들이 자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마당으로 나가 빨간 대야를 툭툭 건드려 보아도 새끼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새끼들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한꺼번에.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빨간 대야 속을 향해 한가득 들어찬 햇살-그 따사롭던 금빛이-을 보곤 아차 했다. 나는 망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망치는 내가 왜 자기를 그렇게 노려보고 있는지도 또 자기 품속의 새끼가 과연 숨을 쉬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너무 황당했다. ‘저게 정말 어미일까, 그 뜨거운 햇살에 고통스러워하며 새끼들은 분명 죽을힘을 다해 낑낑거렸을 텐데, 그때 망치는 무얼하고 있었을까’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빨간 대야를 있는 힘껏 발로 찼다. 망치가 움찔하며 으르렁거린다. 

 

그러면서 죽은 새끼를 더욱더 품에 꼭 안는다. 더 화가 나서 아예 죽은 새끼들의 주검을 쓰레받기에 담아 근처 텃밭에다 묻어버렸다. 쓰레받기에 담겨진 그것들을 보고도 망치는 전혀 자기 새끼들의 죽음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땅 속에 묻힌 그들을 찾기 위해 집안을 헤집고 또 헤집는다. 낑낑, 깽깽, 멍멍..... 머리 속이 멍해질 만큼 고함을 친다.  

 

“니 새끼, 니가 죽였잖아! 지금 누구한테 시비야!”

 

벌써 몇 번째 소리쳤지만 망치의 울부짖는 소리는 더 커지고, 이제는 내 무릎을 앞발로 긁어 상처를 냈다. 밤이 되고, 새벽이 되었지만 새끼를 찾는 망치의 울음은 그칠 줄 모른다. 다음날 아침에 사료를 부어줄 나갔던 엄마는 고개를 절래 흔들며 돌아오신다. 저녁에 부어준 그대로 사료가 쌓인 모양 하나 안 바뀌고 그대로 있더란다. 도대체 새끼에 대한 망치의 사랑과 새끼의 죽음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새끼들의 주검을 끌어안고 좋아하던 망치, 새끼를 땅속으로 보내고 하루 종일 깽깽거리던 망치를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은희경의 ‘내가 살았던 집’에서는 특이하게도 죽음과 사랑의 관련성을 찾으려 한다. 사랑하던 남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그와의 사랑이야기가 시작되고, 햄스터 새끼의 죽음을 놓고 ‘그녀’의 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나서 나는 옆의 짝에게 “사랑이랑 죽음이랑 관련이 있을까?” 하며 바보같이 물었다. 그러자 짝이 대답했다.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죽음을 초월해야만 사랑할 수 있잖아”

 

그때, 나는 짝이 연애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한 귀로 흘렸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망치의 경우도 그렇고, 주인공 남자의 경우도 그렇고 그들은 구태여 죽음을 피하려 들지도 않았고, ‘죽음이란 이런 거야’하고 인식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정지될 뿐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만을 가지고 있었다.

 

죽음 전에 있던 것도 사랑이고, 죽음 후에 있게 될 것도 사랑인 것 같다. 자신이 아니면 타인이, 타인이 아니면 자신인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누군가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보여줄 수 만 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확대미화 된 것이겠지만 만약, 주인공 남자가 만취한 상태에서도 무사히 집에 잘 돌아갔다면 ‘그녀’와의 관계도 거기서 끝났을 테고 여자가 이미 죽어버린 연인에 대해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랑이 끝난 것이다. 

 

한 쪽은 이미 결혼을 했고, 다른 한 쪽은 이미 사랑을 끝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의 몸을 부서뜨리면서까지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사랑을 심어두었다. 그것이 잊혀지지 않던, 잊혀지든 자신은 아무런 동요 없이 사랑하겠다는 듯이.......  

여자에 비해 남자에 대한 서술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느껴진다. 내게 ‘수학선생님을 짝사랑중인 여고생’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내 이 철없는 감정을 사랑이라 호칭하기가 부자연스럽지만, 주인공 남자를 통해 사랑의 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의 경우 내가 마음을 잘 추스르기만 하면 그 분을 위해 내가 흘리는 눈물 같은 것은 흐르게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랑은 죽음처럼 어느 경우에든지 그 끝을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적잖이 힘들었다. 지금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해도 먼 훗날이라도 다시 생각이 난다면 사랑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생각하지 않고 지낸다는 것이 너무나 힘든 일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있으니, 아주 손쉬운 방법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얼마간 또 힘들 테지만.......

책을 덮고 한참동안 생각해봤지만 나는 도무지 ‘그녀’의 딸이 왜 가출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책을 한 두 세 번 쯤 더 읽었을 때였나, 내 머릿속에는 망치 새끼들의 주검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분명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봤을 때 그들은 굉장히 편안하게 죽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미’의 품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으며 한시도 어미의 곁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딸아이는 그들의 처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생사의 기로에 서야했고, 세상의 빛을 봤지만 썩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가 그의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즉 그는 엄마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라, 엄마를 붙잡고는 놓아주지 않는 ‘어떤 것’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감정도 사랑이고,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도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가출해서 집에 돌아오지 않은 채로 소설은 끝났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쯤 그는 죽은 엄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 때문에 죽었다며 자신을 탓하면서도 이제 완전히 ‘그’에게 가버린 ‘그녀’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연년생 남동생과 나는 사춘기인 지금도 엄마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물론 세 살배기 네 살배기였을 때보다는 시들해졌지만 말이다. 갑자기 사랑한다는 건 상대방을 서로 소유한다는 것과 필요충분의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죽음은 그 반대의 개념이 되겠지만 ‘소유’라는 특별한 감정이 없다면 무덤 따위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을 초월한 사랑. 그런 것은 애초부터는 없었는데 ‘사랑’과 ‘죽음’의 부분적 결합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창조된 것일 것 같다. 하지만 죽어서 세운 묘비의 휘황찬란한 글귀가 마지막으로 갖게 될 이름이 아무런 소용없는 것처럼 모든 것은 죽으면 정지한다.

 

이러한 죽음의 특성에 따라 모든 슬픔과 사랑을 함께 정지시키려고 여름옷과 사과와 목걸이와 무덤가와 노래 모두를 정지시키려고 ‘그녀’가 죽음을 택한 거라는 결말은 지금도 내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만든다. 죽음과 사랑. 그 두 가지를 결부시킬 만큼의 특별한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선 마찬가지로 ‘특별한’ 양팔저울이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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