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영광독서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5640

일상으로의 긴 여로 -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를 읽고 

 

                                                                                             지산고 2학년 황지욱

 

여름방학 특유의 발랄한 기분이 충만한 지난 8월 즈음, 어머니와 함께 장영희 교수님의 묘소에 다녀왔다. 교수님의『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꽤나 즐겁게 보았던 터라 관심은 있었지만, 막상 나설려니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굳이 부산에서 그 먼 충남까지 가야만하는 건가 싶었으나 어머니의 집요할 정도의 권유와 더불어 ‘좋아하는 작가의 묘에 간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하는 질문이 기어코 나를 덥석 잡아끌었다. 1년 전 기사를 뒤져가며 ‘천안공원묘원’을 알아냈고, 급히 당일로 계획하면서 유일하게 가져갔던 짐이 이 책이었다. 죽은 저자의 마지막 책을 묘소에 가면서야 읽게 되다니, 어쩐지 죄송스런 마음마저 든 채로 읽어나갔다. 

 

이 책은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 칼럼 중 여태 출간되지 않은 것들을 엮은 유고집이다. 주로 서강대 영문학과 학생들에 관련된 에피소드와 어렸을 적부터 겪었던 장애에 관한 고충, 세상의 쓴맛을 본 친지와 제자들에게 보내는 위로편지가 주류를 이룬다. 어찌 보면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이다. 오토바이로 피자를 배달하는 청년이 아늑하고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집을 들를 때마다 특유의 ‘좋은 냄새가 난다’라고 느꼈다는 이야기에선 온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다. 무협지 같은 격렬한 흥분도, 이외수 씨의 에세이처럼 단호하고 날렵함도 없다. 말하자면 사소함에 의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지’가 상실되어 버렸다고 할까. 이 세상에는 좀 더 적극적이고 열렬한 기운이 필요한데 말이다. 

 

그러나 이 글들은 주홍빛 해거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 마냥 나태하고 무의미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겉으론 일면 그럴지 몰라도 오히려 에피소드 하나하나 그 안으로 골똘히 파고들면 어떠한 글들보다 더욱 사람에 대한 고민이 점점 깊어져 간다. 사람. 사람이란 단어는 왠지 거대하고, 그 말의 범위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그렇다면 친근하게 ‘나’는 어떨까. 이 책에서 ‘사람’과 ‘나’는 다른 개념이 아니다. 무수한 ‘나’가 상호작용하며 이루어진 것이 ‘사람’일 뿐이니까. 나와 너의 마음을 열어가는 것. 사소하지만 사실 그것이 바로 삶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의지’ 그 자체다. 

 

책의 중반부 이후에는 대부분 영미 시들과 짤막한 감상이 짝을 이뤄 나지막이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그중에서도 장영희 교수님이 특별히 사랑했다는 에밀리 E. 디킨슨의『만약 내가(If I can...)』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만약 내가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헛되이 살아가는 것이라니.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누구 가릴 것 없이 탐하는, 저 심드렁한 하늘의 끝자락에서 홀로‘이어야만’ 빛나는 별일까. 

 

성묘를 마치고 저녁 무렵에 기차 입석으로 부산까지 온 다음, 전철로 갈아타고 마저 남은 부분을 읽고 있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아계시던 60대 정도의 단정한 할머니의 시선이 내 책에 가있다는 걸 느꼈다. 그 순간 내게 에어컨은 소용이 없었고, 진땀을 흘리며 책장을 넘겨나갈 수밖에 없었다. 보는 내내 ‘이 분이 다 보셨을까’ 생각하며 적당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슬쩍, 한 장을 넘겼다. 15분 쯤 흘렀을까, 그 분은 계속 같이 책을 보시다가 어딘가에서 내렸다. 두 시선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책은 그제야 나와 함께 떨림을 멈출 수 있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당혹감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긴장 속의 여로였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본의 아닌 배려로 생판 모르는 그 분과 순간적인 교감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으로서, 나와 너로서. 아, 그런 거였구나. 나와 남의 마음을 열어간다는 의미는. 이 너무나 조그맣고 미약한 마음일지라도 선뜻 내어서 건네주는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없는 의지임을 이제야 확신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거창하거나 외견상 멋지진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 일상에서의 모든 이들. 나의 사람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또 그 이후에는 남겨질 생애의 흔적으로나마 그들 중 누군가가 정말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수만 있다면. 여린 희망 한 줌 심어줄 수만 있다면. 나의 삶에는 거대한 사상에 의해 매몰된 매순간 마주치는 일상이 더 필요하다. 비로소 내 별은 산산이 깨어진다. 그리곤 그 조각들이 제각각 흩어져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이 지상 곳곳에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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