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영광독서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5635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를 읽고 

 

                                                                                             남고 용호동 최순남

 

여보,

 

시간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굴러 어느덧 가을의 한가운데에 다다라 있군요. 당신과 함께 한 시간들은 내게는 참으로 소중한 날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이 세상 모든 행복을 혼자 간직한 듯 참으로 행복했었습니다. 내 직장일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해 아쉬울 때도 많았지만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또한 든든한 당신이 있어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는 크고 작은 다툼도 많았었지요. 

 

당신을 만나 결혼하고부터 시작된 시댁과의 갈등은 나를 끝없이 힘들게 하더군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에 아연실색할 때도 있었죠.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어머니만 감싸려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의 태도는 나를 더없이 힘들게 했죠. 극과 극을 치닫는 당신과의 신경전으로 내 몸과 마음은 망신창이가 되고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해야만 했죠. 당신도 나도 점점 늙어가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나의 세계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어요. 시댁식구들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은 언제나 내 가치기준과 부딪혀야만 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할 줄만 알았던 내 젊은 날의 어리석음으로 이렇게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인지, 이 즈음에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으로 힘든 나날들을 보냈던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내게는 책임져야 할 사랑스런 아이들이 있었죠. ‘더 이상 나약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다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가 조금만 양보하고 생각을 달리하면 주변사람들이 모두 편해질 수 있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반문해 본 적도 많았어요. 이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였고 가만히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단련(?) 시켜주고 아이들에게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한 시댁식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을 느끼면서 그럭저럭 적응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일까요? 

 

언제나 무던한 당신, 아이들이 점점 커 가는 동안,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의 자아성취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강한 열의가 솟구쳐 올랐어요.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가장 ‘엄마 손’ 이 필요한 때였지만 나는 과감하게 아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새로운 공부에 매진해 보았죠. 그 때가 아니면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시댁과의 불편함과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 보다 내 자신의 성취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과감하게 뒤늦은 공부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석사학위 취득은 나에게는 하나의 성취였어요. 자신감이 생기고 두려움이 없어졌거든요. 그동안 손자들을 사랑으로 돌봐주신 시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은 무엇으로도 보답하기 힘들 것 같아요. 묵묵히 지켜봐 주고 말없는 성원 보내준 당신과 티없이 밝게 자라준 아이들에게 고맙고 미안하고 그리고 사랑해요..... 

 

내 얘기 잘 들어주는 당신. 나에겐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친정 부모님에 대한 슬픈 기억이 있어요. 북쪽 땅에 고향을 두시고 6.25때 피난 내려오신 부모님은 그야말로 굴곡진 삶을 살아내셨어요. 부모님은 북쪽에 계실 때 첫 딸을 낳고 이듬해 6.25가 터져 아버지는 군대(보국대)에 가시고 어머니는 1.4 후퇴 때 중공군의 총을 피해 어린 아이를 등에 업고 흥남부두 수많은 피난민 인파에 섞여 배를 타야만 했어요. 거제 피난민 수용소에서 임시 거주하다가 극적으로 아버지와 재회하셨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정착하신 부모님은 실향민이 되셔서 일가친척 하나 없이 한평생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한 때는 아버지 사업이 번창하여 넷째 딸인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꽤나 유복한 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머니의 모진 고생은 시작되었죠. 빚더미에 살던 집을 남에게 내 주어야 했고 어머니는 어린 우리들을 이끌고 길가 허름한 집에 나 앉아야만 했어요. 어린 내 기억에 대궐 같았던 그 집이 어제까지 분명 우리집 이었는데 오늘은 우리집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 때의 어머니 심정은 어떠하셨을까요? 언니들이 초, 중, 고등학생 이었고 나와 막내인 남동생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어요. 부모님은 평생을 자식들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자신의 안위는 뒤돌아볼 여력도 없이 앞만 보고 사신 분이셨어요.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두 분만 남게 되었을 때 이제는 홀가분하게 행복한 노년을 보내시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갑자기 밀려온 외로움과 기력의 쇠잔함으로 힘든 여생을 보내셨어요. 막내딸인 나는 가까이 살면서도 내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친정에 드나들면서 부모님의 외로움을 덜어드리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그 당시를 회상해보면 지금도 가슴 한 켠이 먹먹해 옵니다. 내리 사랑이라고 하지만 못다 한 효도로 이 자식은 웁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아버지.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이제는 친구같은 당신, 나도 이제 지천명의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있군요. 우리는 인생 전반전을 치열하게(?) 살아왔잖아요. 이제 인생 후반전을 위한 준비를 해야겠지요. 축구 선수들이 전반전을 힘껏 뛰고 난 뒤 10분간의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남은 후반전을 위해서 최선의 전략을 짜듯이 우리도 인생 후반전의 전략을 짜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후반전의 전략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영웅이 될 수도 있고 패잔병이 될 수도 있듯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여보, 지금은 좋은 계절입니다. 낮 동안의 태양의 열기는 아직 남아 있지만 아침 저녁 선선한 바람은 당신과 함께 어디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군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2010. 10. 20. 당신의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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