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영광독서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5657

정의란 무엇인가는 샌델도 모른다 - <정의는 무엇인가>를 읽고 

 

                                                                                             부산진구 가야1동 한종빈

 

<1>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이다. 풀이하면 우주의 이치인 도를 ‘도(道)’라는 단어로 한정하려 드는 순간 그것에서 멀어진다는 뜻 쯤 된단다. 너무 난해한가? 그럼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사랑한다 했음에도 항상 뭔가 모자란 듯했던 그 애틋한 기억. 그건 듣는 쪽도 마찬가지라 꼭 ‘얼마만큼?’이라 되묻게 된다. 이는 분명 ‘사랑(愛)’이라는 단어 속에 사랑이 오롯이 다 들어가지 못한 탓일 게다. 한낱 사랑도 다 채우지 못하는데 우주의 이치야 말해 뭣하겠는가. 우리는 때론 언어의 틀로 가둘 수 없는 것들까지도 하나의 단어로 명명하고 그것을 정의하려 든다. 

 

<2> 

 

나는 삼수를 했다. 참 무던히도 공부 못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단지 못했던 것일 뿐, 안한 건 아니었다. 내게 있어 공부는 나의 미래인 동시에 고등학교 교사이신 부모님의 체면까지 걸린 문제였으니까. 남의 자식들 진학지도 하면서 정작 제 자식 진학지도는 엉망이라며 부모를 욕되게 할 순 없었다. 어떻게든 그런 불효만은 피해보고자 악착같이 공부했고, 세 번의 도전 끝에 비록 서울대는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합격할 수 있었으니 그래도 본전은 친 셈이다. 힘들게 올라탄 서울행 기차에서 나는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힘들게 공부한 것에 대한 매우 타당한 보상이다. 학벌에는 단지 수능 점수만이 아니라 그 점수를 얻기 위해 흘렸던 땀방울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물론 그것이 전부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그 사람의 성실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써 학벌은 충분히 유효하다고 믿었다. 놀 거 다 놀아가며 공부한 녀석들과 내가 똑같이 취급 받는다는 건 억울한 일이다. 

 

<3> 

 

야학 교사를 신청한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고백컨대 숭고한 봉사정신으로 시작한 건 결코 아니었다. 차라리 대학시절의 로망쯤으로 생각했다는 쪽이 솔직하다. 어쩌면 심훈의 「상록수」에서처럼 진보적 가치관을 지닌 신여성과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물론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허나 동기야 어떠했든 7개월 동안의 야학활동은 나의 가치관을 상당 부분 바꿔놓았다. 난생 처음 접한 ‘못난’ 이들의 삶은 그만큼 생경하고 불편한 것이었다. 어째서 같은 인간이 이리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야만 하는 걸까? 어르신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자라나는 저 아이들이 부모의 가난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게 과연 정당한가? 부조리하다. 분명 뭔가 잘못됐다. 여기 있는 학생들 모두가 한 달 동안 학원에 다닐 수 있는 돈으로 어느 누군가는 하룻밤의 유흥을 즐기고 있다는 게 당최 말이나 되는가? 

 

<4> 

 

요즘 최고의 화두는 도덕성이다. 정치인도, 연예인도 도덕성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때문에 어느 총리 후보자는 짐을 싸야만했고 어느 연예인은 수개월 동안 네티즌의 질타를 받아야 했다. 도덕성 덕에 덩달아 뜨거워진 것이 바로 ‘정의’였다. 정의야말로 도덕성을 보증할 더없이 좋은 잣대가 될 테니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비정상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결국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게다. 필경 많은 사람들이 정의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이 책을 펼쳐들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정의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다만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던 저명한 학자들의 여러 이론들을 소개할 뿐이다. 게다가 저자는 어느 한 가지 이론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특정 이론을 옹호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다른 근거를 끌고 와 그것의 허점을 파고든다. 그렇게 제시와 비판만을 반복하다 끝내버리니 독자의 입장에서야 다소 허무하기도 하겠다만 한편으론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저자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제시된 이론들은 결국 자유를 옹호하느냐, 평등을 옹호하느냐로 나눌 수 있는데 자유와 평등이야 말로 한 세기를 끌어온 인류 최대의 논쟁거리 아니었던가! 샌델 교수라고 별 수 있겠는가. 

 

<3> 

 

야학 교사를 신청한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나보다 못한 환경에서 사는 이들과 직접 조우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힘들게 생활하는 그들을 보며 왜 같은 인간이 이리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지 의아했고 화도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녀석과 술 한 잔 걸치다 취기(醉氣)에 이에 대한 울분을 토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맞장구 쳐줄 줄 알았던 그 녀석, 한참을 듣고만 있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건 과연 정의로운 행동일까? 만약 그런 세상이라면 그 학생들이 굳이 힘들게 공부할 이유는 뭐람? 너, 빨갱이 기질이 있구만! 

 

<2> 나는 삼수를 했다. 참 무던히도 공부 못하는 학생이었다. 여차저차 서울에 올라오긴 했지만 가끔 불만스러울 때가 있다. 이유인즉 대학 동기 중 한 녀석은 고등학교 때 과목별로 과외를 받았다고 하는데, 내 비록 머리가 나쁘긴 해도 그 녀석처럼 공부할 수 있었다면 적어도 삼수는 하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괜스레 부모 잘못 만난 느낌이 든다. 그 녀석의 노력과 내 노력이 학벌이라는 잣대로 똑같이 평가받는다는 것이 당최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렇게 혜택 받으며 공부한 녀석과 내가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1>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은 ‘도가도, 비상도’이다. 우주와 사랑은 그러했는데, 그럼 정의(正義)를 정의(定議)하는 것은 어떠한가? 정의는 과연 하나의 단어로 명명되고, 하나의 뜻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만들어보고자 노자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저마다 머리를 싸맨지도 어언 2천년이 흘렀다. 하지만 샌델 교수의 책을 읽어 보니 결국은 다시 노자다. 정의는 단 한순간도 고정된 적이 없었다. 시절이 흐르고 사람이 변함에 따라 정의도 함께 움직이고 있었던 게다. 결국 우리는 노자가 도(道)를 보듯 정의를 대할 수밖에 없을 성 싶다. 다만 변해가는 정의를 그저 바라볼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정의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저자가 굳이 정의를 정의하지 않았던 것도 읽는 이들이 각자 저마다의 정의에 치열하게 다가서길 바랐기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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