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3062

행복을 선택하는 열쇠, 가족 - <가족의 두 얼굴>을 읽고 -

 

                                                                                                                                             이은경

 

다급히 울리던 핸드폰을 집어 든 찰라 벨소리가 끊긴다. 새벽 4시 57분, 누군가를 찾기에 이른 시간이다. 부재중 목록에 뜬 지역번호는 익숙한 듯 낯설다. 2-3분 간격으로 6번이나 나에게 발신을 시도했던 번호 앞에서 나는 문득, 짧은 단발에 감색 작업복을 입은 열여덟의 고모를 떠올렸다. 데자뷰였던가. 집어든 책을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내려 갔던 9월의 어느 새벽에도 내 기억 안에 열여덟의 고모가 서 있었다. 

 

[가족의 두 얼굴]에 기술 되었던 어린 시절의 고통을 반복하려는 무의식적 강박은 고모에게도 작용했던 것일까. 고모는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을 선택했다.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오빠가 있는 부산으로 와 공장에 취직한 고모는 나와 나이 터울이 얼마 되지 않아 친자매처럼 지냈다. 고등학교 교복 입어보는 게 소원이라던 고모는 월급날이면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사주며 넌 열심히 공부해, 주문처럼 속삭이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것들보다 더 기다렸던 건 집근처 시장에서 팔던 통닭이었다. 통째로 튀겨져 누런 봉투에 담아주던 그 통닭은 고모의 월급날만 먹을 수 있는 별미였고, 어린 내가 누구보다도 손꼽아 고모의 월급날을 기다리는 간절한 이유가 되었다. 고모도 그것을 잘 알았던터라 월급날에는 꼭 기름에 물든 누런 봉투를 한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식구들이 나보다 더 먹을까 허겁지겁 뜨거운 닭살을 뜯어냈던 기억, 그리고 천천히 먹으라고 살을 발라주던 고모의 야윈 손도 기억의 언저리를 맴돈다. 벌써 20여년이 지났다. 그 가을, 고모는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집을 나갔다. 성인이 되어서야 알았다. 고모가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고 그 일로 아버지와 의절하셨다는 것을. 아버지의 일방적 의절이었으나 고모는 그날이후 단 한 번도 우리집 문을 넘지 않았다. 십여 년이 흐른 후 한 번, 그리고 삼 년 전에 또 한 번 나에게 전화를 걸어 말을 속에 쌓아둔 사람처럼 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삶의 버거움을 털어 놓곤 한동안 또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가족의 두 얼굴]에서는 어린 시절을 외롭게 보낸 아이는 상처 입은 내면으로 살아간다고 본다. 그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로 인해 성장하기를 거부하고 그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으면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고모의 상처는 가난이 아니었을까. 가난으로 인해 또래 친구들이 교복을 입을 때 고모는 감색 작업복을 입었고, 연필로 공부를 하는 대신 나에게 연필을 사다주는 것으로 학업의 꿈을 대신 해야 했다. 그런 고모가 그나마 형편이 나아보이는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것도 아마 그런 상처가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상처를 피하려다 더 큰 상처를 만난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고모는 행복해 지지 않았으니까. 어린 시절의 상처가 되풀이 된다고 했던 저자의 말처럼 우리 가족에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되풀이 되었다. 오히려 은밀히 밀봉해둔 상처는 포도알처럼 줄줄이 또 다른 상처를 엮으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갔다. 아버지는 자식 같던 고모와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셨고, 고모는 당신의 바람과 달리 공부에 별 뜻이 없는 자식들과 10원짜리 한 장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나 감시하는 남편 때문에 조금은 버거워 했다. 

 

새벽, 부재 중 전화에 재발신을 시도했다. ‘너무 일찍 전화했지?’로 시작된 고모의 이야기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삶의 푸념을 어딘가에 잠시 내려놓고 싶어서 인지 고모는 지친 일상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그저 말이 하고 싶었다는 말로 고모는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끊긴 전화를 보며 불행의 악순환을 끊으려면 고리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끊어버린 알렉산더 왕의 지혜와 결단이 필요하다던 작가의 말이 입 안을 맴돌았다.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것도 지혜와 결단이 아니었나 싶다.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고모의 과거는 현재에도 족쇄처럼 고모를 억누르고 있었고 아버지는 가족과 화해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셨고, 나는 언니 같던 고모를 잃은 후 감색 작업복과 시장에서 파는 통닭에 대한 온기 있는 기억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외면하는 것으로 상처를 회피했다. 우리 모두가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도 상처는 내면에 자리 잡아 다른 가족들에게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 되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는 그 고리를 끊고 생에 좀 더 당당히 맞서야 하지 않을까. 

 

고모가 떠난 후 아버지는 오래 가슴 아파하셨고 미안해 하셨어. 그리고 나는 한순간에 엄마 같던 고모를 도둑맞은 것 같아 자주 외로웠고 힘든 사춘기를 보내야 했어. 그래도 우리는 고모가 행복해지길 바랐어. 그러니 고모, 힘들 땐 쌓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전화하고 고모부께도 솔직히 말해. 자기를 사랑해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잖아. 고모가 선택한 인생이니까 좀 더 당당하게 맞서봐. 후회만 하고 살기엔 인생이 아깝잖아. 

 

고모에게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전송하며 나는 고모가 예전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를, 그래서 고모 가족들 모두가 행복해 지기를 마음 깊이 바랐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 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행복의 근간은 가족에 뿌리를 둔다. 자기애를 가져야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이, 내가 변하지 않으면 가족도 변하지 않고 불행이 되풀이 된다는 글이 내 마음에 도장처럼 박히는 새벽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지난 시간들이 모두 아물고 새살이 돋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노력하고 싶다.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열쇠는 결국 그 가족 안에, 우리들 마음 깊이 숨어 있다는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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