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3058

박범신의 <소금>을 맛보다

 

김서영

 

프롤로그 : 소금이란?

 

짠맛이 나는 흰 빛깔의 결정체. 주성분은 염화나트륨이며 조미료와 방부제, 화학공업의 원료로 쓰인다. 소금의 사전적 정의다. 

 

1. 어렸을 때, 난 오줌싸개였다. 철이 들고 나서도 이불에다 종종 지도를 그리는 일이 있자 어머니는 내 종아리를 때리고 급기야 내 머리 위에 키를 씌어 이웃집에 보냈다. 냉큼 소금을 얻어오라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 소금은 오랫동안 부끄러운 맛 반, 서러운 맛 반으로 버무려져있었다. 그 일이 있고 곧 내가 오줌을 가렸는지는 기억에 없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소금은 다시 서글픈 모습으로 내게 왔다. 결혼 후 아버님의 칠순잔치에서였다. 시외삼촌은 당신의 매형과 누님 부부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객을 향하여 울먹거리며 말했다. “제 매형은 자식 7남매를 뒷바라지 하느라 40리를 걸어 다니며 장에 물건을 내다팔았고, 누님은 베틀을 돌릴 힘이 없어 소금물을 타 마시며 허기를 채웠습니다.’라고. 이 말씀에 노부부는 말이 없었지만 그들의 살아온 날이 고단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소금은 가난과 아픔의 맛이었다. 

 

2. ‘그날 아침 한 염부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지난여름 내가 펴든 박범신의「소금」은 다짜고짜 한 염부의 죽음부터 알린다. 뜨거운 햇빛 속에서 소금 작업을 하던 염부의 사인은 어이없게도 소금부족이다. 평생을 소금밭에서 뒹굴던 염부가 소금과잉이 아니라 소금이 모자라 죽었다? 독자에게 의문의 실타래를 던진 채 염부이야기는 돌연 배롱나무에게로 자리를 내어준다. 아내와 이혼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강의를 하는 시인인 나는, 배롱나무가 있는 폐교에서 스무 번째 자신의 생일날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시우라는 아이를 우연히 만난다. 평생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본 적 없던 시우의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집과 직장을 시침과 분침처럼 오가며 가족의 뒷바라지에 헌신하며 그것을 운명처럼 얌전히 받아들이던 아버지. 그랬기에 갑작스런 그의 가출에 시우와 두 언니, 어머니는 배신감을 느끼고 가족은 머잖아 해체되고 만다. 나는 우연히 강경에 갔다가 친구 텁석부리와 함께 한대수의 노래를 좋아하는 옥녀봉 꼭대기 소금집의 신비한 청동조각 김을 만나게 된다. 전신마비 남자와 함열댁, 척추 장애인인 큰딸 신애, 실명하는 선천적인 병에 걸린 둘째딸 지애로 이루어진 그 가족은 얼핏 보아도 좀 특이해 보인다. 

 

3. 호기심에 청동조각을 찾아 소금밭에 갔다가 나는 알게 된다. '선기철 소금'의 선기철이 시우의 할아버지 이름이라는 것을. 청동조각 김이 바로 10년 전에 시우를 버리고 사라진 시우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나는 조금씩 그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염전을 하던 아버지를 도와드리려고 1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갔다 쫓겨 돌아온 일, 쓰러져 있는 자신을 구해준 첫사랑 세희 누나, 두 형과 두 여동생을 대신해서 아버지에게 유일하게 ‘뽑힌자’였으며 짐꾼으로서의 ‘미륵불’이었던 불우한 기억, 추억을 송두리째 지운 채 결혼하여 가족의 그림자로, 돈을 버는 기계로 살아간 일. 청동조각은 시우의 스무 번째 생일날 ‘소금 자루’를 통해 잊어버렸던 꿈과 소중한 첫사랑과 염전에서 소금을 거두다가 쓰러진 아버지를 기억해낸다. 시우 아버지가 회상 장면, 시우의 회상 장면 사이사이에 시인인 나는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렇게 소설「소금」속에는 시우의 아버지 이야기, 시우의 아버지의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시인인 나의 아버지 이야기까지 아버지 1, 아버지 2, 아버지 3......아버지 n 등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사우디아라비아 모래바람 속에서 온갖 역경을 겪으며 가족뒷바라지 하다가 가족에게 역 소외된 시우의 아버지. 아들의 대학졸업식에 맞추어 과로하다 소금을 안고 엎어지던 시우의 아버지의 아버지. ‘애 하나 공부시키려고’ 부두의 일용직 노동자로 직업을 바꾸어 일하다 '치사해'를 외치며 사고로 죽은 화자의 아버지.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치사하게 살며 아들에게 치사함을 대물림하는 것인가. 

 

4. 조금도 ‘치사하지’ 않았던 내 아버지도 아버지n의 행렬에 보탤 수 있을지, 나는 가만 고민한다. 내 아버지는 소금의 ‘소’자도 어울리지 않는 흰 설탕과 같은 분이었다. 아버지는 도시의 물을 먹은, ‘차도남’ 그 언저리에 있었고, 고등학교를 중퇴하긴 했지만 식자였고 용모가 반듯했고 공군을 제대하고 세간 한 칸을 보장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소금이 주는 컬컬하고 짠 맛을 극도로 싫어했고, 결혼해서도 오직 달디 단 것을 찾았던 어린아이였다, 고 들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버지는 선명우처럼 제 발로 걸어 나가 청동조각 김처럼 살 수 있는 의지마저 없는 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버지를 보쌈해서 고려장을 했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당신이 대형 사고를 쳤으니까, 당신은 언제나 당신뿐이었으니까. 우리를 낳기만 했을 뿐, 당신에게 자식이 있기나 했는지, 당신이 어머니를 아내로, 단 한번이라도 안아준 적이 있었는지, 우리는 늘 불만이었다. 평생을 단 것만을 고집하진 아버지는 가족에게 투정이란 투정은 다 부렸다. 내 아버지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 할 때의 소금이 아니라, ‘소금 한 줌 뿌려라’ 속의 소금이었다. 우리는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보냈다. 

 

5. 아버지도 아버지가 아닌 당신의 삶이 있었던 것을 나는 인정하기 싫었다. 아버지에게도 불면 꺼질까, 손에 쥐면 깨질까 한 아기 적이 있었겠지. 아장아장 걷던 유아기도, 얼음 지치던 소년기도, 여드름으로 방에 처박힌 청소년기, 첫사랑 가슴앓이시절도 지냈을까? 그러나, 당신의 ‘숨은 꿈은 버릴’ 것을 강요받은 때가 왔으리라. 불행히도 일찍 부모님을 잃었던 당신은, 형님 내외의 눈치 속에서 청년기를 보냈던 당신은, 사랑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사랑을 만지는 법도, 보는 법도 배우지 못한 가엾은 분이셨다. 그러니 사랑 따위를 주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난 위로받고 싶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아버지가 사다주시던 ‘빠다 코코넛’을 먹고 아버지가 따오는 과실을 먹고 자랐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당신의 흰 손은 직물공장의 염색약으로 검푸르게 변했고, 낮지 않았던 학문은 농사 속에서 파묻혔고, 몇 푼 되지 않았지만 그 월급은 자식들 공부에 다 들어갔다. 다만, 아버지의 농밀한 침묵, 어눌한 말주변, 끊임없는 투정에 당신의 희생은 묻혀버렸다. 글의 말미에 이르자 내 아버지에 대한 원초적 기억들이 천천히 복원되어 가는 것 같았다. 소설에서처럼, 아버지는 수많은 해석의 길을 거느린 놀라운 텍스트였다. 마흔 여섯에 나는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 

 

6. 작가는 묻는다. “이 거대한 소비 문명을 가로지르면서, 그 소비를 위한 과실을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따 온 ‘아버지’들은 지금 어디에서 부랑하고 있는가. 그들은 지난 반세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니, 소비의 ‘단맛’을 허겁지겁 쫓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 늙어가는 아버지들의 돌아누운 굽은 등을 한번이라도 웅숭깊게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오늘도 염부 1, 염부 2, 염부 3, 염부 n은 소금밭에서 몸속에 소금이 모자라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모든 걸 다 뺏긴 채 효용가치가 떨어져 폐기처분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에게도 필요한 분량만큼의 소금을 돌려드리기를, 그의 굽은 등을 들여다보기를.

 

에필로그 : 다시 소금이란?

 

가출의 짠맛, 첫 사랑의 신맛, 인생의 쓴맛, 빨대론의 매운맛이 나는 무색무취의 광물. 아버지가 아닌 그냥 인간이 가진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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