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3055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여덟 단어>를 읽고 -

 

김희현

 

휴직 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내 삼십대와 함께.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 인생. 이 여덟 단어가 뿌리에서 나와 땅을 토닥토닥하더니 부서져 다시 뿌리에 스미는 나뭇잎이 된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인생, 저자처럼 나 역시 이 인생이란 단어가 가장 무서운 걸까? 내 마음 속의 점들을 연결하면 별이 된다고 저자는 말했다. 내 인생에 이미 있어왔고 지금 벌어지며 앞으로 펼쳐 질 많은 점들, 모두 이어보아도 한 직선, 그것이 일생이고 인생일까? 딸 아이 교과서의 생의 수직선이 생각나고 딸 아이 방 벽지의 별이 보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인 게 인생이더라.” 저자의 덕담도 들린다.

 

곧 맞이하게 될 마흔의 개인적 삶에 대한 자존과 가르치는 것이 가리키는 방향에 대한 본질과 미세한 솜털까지 보이는 봄빛 색, 해질녘 하늘 구름 사이 비행기 지나간 자리 색, 남녀의 뒷실루엣만 보여주는 검은빛 색,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가로등 색, 막다른 골목에서 만져본 애인의 손색, 한밤을 유영하는 오로라 색, 오래된 플라타너스 그늘 색,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나다운 색이 보고 싶어 일터를 잠시 떠났다. 고전을 탐독하고 미술관을 산책하며 조식 선생님이 올랐던 지리산을 수없이 오르고 낯선 이, 그저 아는 이, 친밀한 이를 가깝게, 때론 멀게 만나 소통해 온 지난 3월부터의 내 안식의 시간들. 깊이 보며 여행을 삶처럼, 삶을 여행처럼 또박또박 걸어온 내 시간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또 무엇일까? 

 

꽃말이 기쁜 소식인 큰구슬붕이꽃이 봄을 알렸고 땅은 자기 몸을 찢고 줄탁동시하여 새잎 연두가 났다. 동백과 목련이 제 몸을 뒤틀어 힘겹게 그러나 어느덧 톡 피어났고 나비가 이륙의 활주로를 타고 때로는 따로, 때로는 같이 날아다녔다. 나는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앤딩’이 가볍게 팡팡 터지는 2013년 놀이공원을 지나 타는 여름 느려진 일몰 속에서 팥빙수 팥빙수 외치며 걸어 다녔고 어느덧 매미소리 그치고 귀뚜라미 울기에 잠시 멈추어 서서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는 생명 럼블피쉬와 죽은 생명 나뭇잎이 공존하는 조계산 선암사의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모든 것을 다 받아낼 것 같던 해우소도 보이고 눈물이 나면 가보라 했던 정호승씨의 시도 스쳐가고 슈베르트의 ‘숭어’도 뛰고 마침내 ‘죽음과 소녀’의 첫 바이올린 음이 나를 사로잡는다. 공중부양 현위의 인생, 우리는 어쩜 죽어가는 모든 것들 속에서 삶을 배우는 것이지도 모르겠다. 메멘토 모리 그리고 아모르 파티. 저녁예불 드리기 오 분 전 땅거미 등에 지고 마음 심 자를 심장에 새기며 법고 앞에 둘러선 불자들처럼, 해뜨기 직전 하루의 시작을 신에게 의탁하며 ‘명하신 것을 주시고 원하신 것을 명 하소서’ 되 내이는 새벽기도 시작 오 분 전의 기독교신자들처럼 나는 어느 때보다 섬세한 손가락으로 내 SNS의 상태 메세지를 바꾼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 서시’ 낭랑 18세였지. ‘기우뚱리며 작아지는 섬하나’라는 이나미씨 책을 읽고 독후감상문을 써서 제3회 영광독서감상문대회에서 수상한 때가. 그 문학소녀가 서른아홉 중년이 되는 동안 영혼이 굶주려 읽은 엄청난 양의 책과 알짜배기 영양분도, 제세동기가 왔다 갔다 하는 중환자실에서 단 하루 느낀 생과 사의 실체 앞에서는 속수무책임을 이미 알지만 나는 휴직기간 동안 200여권의 책을 읽었고 많은 사람 많은 일들이 나를 일상으로 초대했으며 삶을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신생-성장-소멸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얼마 전 나는 어머니를 잃고 광활한 대지 한밤의 양처럼 바들바들 떨면서도 입술 꼭 다물고 야무딱진 얼굴로 조문객에게 의연한 인사를 하는 친구를 안아주었고 이혼을 생각하며 남편이 아이를 향해 퍼붓는 욕설을 어쩔 수 없이 녹음한 친한 동생의 하소연을 들었다. 또한 우울증에 자살 시도 했었던, 지금도 약으로 버티는 친구 동생 녀석이 근무하는 시골 면사무소에 다녀왔다. 낭랑18세를 함께 보낸 여고 동창생의 동생이다. 건축하는 친구는 이제 자기 집을 설계하여 멋지게 지을 만큼 유능해졌으나 언제 또 사랑하는 동생이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될까 걱정한다. 청개구리 한 마리 앉을 공간 없는 가시연 가득한 우포늪의 새벽을 손잡고 걸으며 우리는 이상은의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를 불렀고 어린왕자와 그리스인조르바를 이야기했으며 앙드레지드의 ‘현재 순간들의 지속적인 일어남’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달팽이 같음을 몰랐던 것은 아닌데 뭔가가 안쓰럽다. 인생은, 삶은, 사랑은...전인미답. 촉촉이 젖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나이 마흔에 잃어버린 자아 찾겠다고 선언하며 자유를 외치는 남자, 레이저로도 치료 가능한데 암 덩어리의 뿌리마저 자라게 하지 않겠다고 과감히 가슴을 절제한 여자, 전쟁 같은 결혼생활이 지긋지긋해 결혼은 제도에 불과하다며 불륜과 로맨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남녀, SNS의 순기능, 역기능을 모두 활용해 소통하고 있으나 외롭다 느끼는 사람들, 절과 교회, 성당에서 그들의 신을 만나 눈물을 쏟아내는 사람들, 그 많은 학교의 교실 한 칸이나 그 많은 빌딩 사무실의 한 자리나 그 많은 관공서의 의자 하나 차지하고자 공부에 매달리는 청춘들,-여기서 ‘그 많은’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절실한 그네들에게는 좁디좁은 취업문일 게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를 칠판에 크게 써 놓고 그 의미에 대해 몇 시간을 토론하며 10대 20대 30대...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의미는 조금씩 달라질 거니까 잊지 말고 찾아내거라 말씀하셨던 내 중학교 1학년 때처럼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행운일지 모를 이 시대의 학생들, 그 외 딱히 거론되지 않아도 충분히 아는 육체적 질병, 실연의 상처, 정신의 아픔 등으로 힘겨운 보랏빛 저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누가 누구를 탓할 수도, 어느 세상법의 적용으로 질타 할 수도, 누군가가 대신 치루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본인이 스스로 보아내고 겪어내고 견뎌내어야 할 연습 없는 인생살이인 것이다. 깊이 새겨보면 스며드는 것을 알 수 있다. 권위에 어떻게 도전할지 길도 보일 것이다. 그 모든 힘겹고 외롭고 아픈 시간을, 모진 풍파라 표현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많은 분들께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 인생. 이 여덟 단어를 나 역시 다시 드린다. 그 단어의 힘을 믿는다.

 

바람이 분다. 저만치 앉아있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인다. 티격태격 진짜 남의 편인 것만 같아 미운적도 많았고 살뜰히 챙겨 주지 않는 무심한 사람이라 서운해도 했건만 마흔이 훌쩍 넘어 직장을 잃게 된 그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뒷모습을 여미다’ 라는 표현을 생각할 무렵 SNS가 왔다. 작년 담임했던 아이가 수학여행을 갔단다. 저자가 말한 첨성대에 대해 깊이 보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잠깐 생각했다. 그 녀석이 인터뷰하자했다. “선생님! 기억나요. 1+1=1임을 증명하는 수업, 꽃이 아름다운 이유를 말하 는 수업, 문닫고 들어와라는 문장이 과학적인가 하는 수업,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담긴 아는걸 말하는 거나 말하는 걸 아는 거나 했던 이야기, 사고 는 한순간이라는 말씀, 역지사지 인생, LED로 만든 따뜻함을 파는 가게 수업, 선생님의 유년시절의 경험담... 선생님은 저희들을 떠나 계신 동안 무 엇을 기억하시고 무엇을 찾으셨나요?” 초등학교 6학년, 꽤 성숙된 앎, 기억, 현문이다. 행복하고 고마웠다. 답은 돌아갈 무렵. 윙크했다. 

 

휴직 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내 삼십대와 함께. 딸아이 준비물로 떨어진 낙엽을 함께 주웠다. 이것이 땅을 토닥토닥하다 가을비와 함께 부서져 다시 뿌리로 스미겠구나. 신생-성장-소멸 그 끝없는 반복 속에서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권위, 소통, 인생 이 여덟 단어를 만났다. 이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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