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7308

'마음속 반성문에 마침표를 찍다.' 

 

탁지은

 

나에게는 아버지가 슈퍼맨이었고, 스파이더맨이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있다. 수많은 영웅 중에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10년 전 설 연휴 때 일어났던 한 사건 때문이다. 종갓집 외며느리인 엄마는 설 연휴 다음 날 있는 증조부님의 제사 때문에 하동 할머니 집에 더 머물러야 했고, 출근을 해야 하는 아버지는 나와 함께 부산에 먼저 도착했다. 아버지는 나를 집에 내려주시고선 할머니께서 싸주신 세찬을 고모 댁에 전해 주러 가셨다. 집에 혼자 남은 나는 겁이 많아 현관문은 물론이고 베란다 문까지 꼭꼭 잠그고는 거실에서 곤히 잠이 들었다. 꿈나라에 빠져있는 동안 달은 우리 동네를 넘어 가버렸고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동틀 새벽녘이었다. 남은 잠기운을 물리치고 정신을 차렸을 때, 퍼뜩 고모 집에 가신 아버지가 생각났고 전화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일어난 자리에서 모래알 같은 유리조각이 흘러나왔고, 아버지는 주먹에 멍이 들고 다리에 피를 흘린 채 담배를 피우고 계신 게 아닌가.. 내가 잠든 그 시간 동안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날 아버지께 들은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초인종을 눌러도 집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애타는 마음에 손에 멍이 드는 줄도 모르고 문을 두드리셨다. 아버지가 딸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은 소음이 되어 빌라 안을 가득 채웠고 순간 아버지는 어린 딸이 집에서 무슨 일을 당한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을 느끼셨다. 그리고선 거의 이성을 잃은 채 우리 보금자리가 있는 곳 까지 가스관을 밟고 베란다를 통해 올라오셨다. 그 때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아, 죽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딱 좋은 모습이었고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놀랄 겨를도 없이 유리문을 발로 차고 집으로 들어오셨다. 아버지가 흔들어 깨웠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철없는 모습으로 입술을 씰룩거리며 자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제 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주저앉아 몇 시간동안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 날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몰랐다. 심지어 유리가 박혀 피가 나고 있는 아버지의 다리를 보고서도 걱정보다 혼이 날까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서 야단치기보다 괜찮다고 위로해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철없는 행동으로 아버지의 가슴을 철렁하게 했던 이 사건은 사춘기를 겪고 대학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그런데 며칠 전,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지 않으면 생각도 잘 나지 않던 이 사건이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읽고서 다른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사건 이후 10년 동안 아버지를 슈퍼맨, 스파이더맨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나에게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준 이 책은 바로 ‘아버지니까’이다. 제목만 들어도 뜨거운 감자를 삼킨 것처럼 아프고 먹먹함이 느껴지는 이 책은 기자였던 송동선 씨가 아버지로서 살아온 삶을 그려내고 있다. 세 아들을 위해서 섶을 지고 불구덩이라도 뛰어드는 심정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나는 지난날 내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누구나 부러워하는 SKY에 다니는 세 아들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빚을 얻어 시작한 아내의 사업이 실패 한 후 부터 그의 삶에 불행이 시작된다. 빚을 갚기 위해 전략상으로 이혼을 한 것이 아내와 다시 돌이 킬 수 없는 사이를 만들고 잘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 두게 되면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불행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아이들을 위해 쉼 없이 일자리를 구하러 다닌다.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한문 학원’을 열기도 하고, 스님의 권유로 찻집을 열기도 하지만 하는 것 마다 번번이 망해 빚더미에 앉게 된다. 그 후 방문 판매일 부터 마트 카트 정리 일, 땅굴 파는 일 등 아이들의 학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수모도 감수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세상은 야속하게도 끊임없이 그를 외면하고 결국 그는 자신을 위한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고기잡이배를 타게 된다. 하지만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뱃일은 그에게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결국 정신적 신체적 고통만 안고 그만두게 되고 이내 불행 속에서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더 큰 시련이 다가온다. 그가 궂은일을 하면서 갖은 수모를 견뎌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세 아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세 아들들 중 둘째 아들이 자살을 한 것이다. 그는 아들의 죽음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에 충격에 빠져 오래도록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심지어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린 탓에 눈까지 침침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이기에 남은 두 아들을 위해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고 막노동판을 전전 하다가 결국 그는 절에 들어가 ‘처사’가 된다. 

 

저자이자 주인공인 그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세 아들이 자신에게 써준 편지와 함께 아버지로서 살아오면서 느낀 깨달음을 남긴다. 그리고 ‘두 아이를 위한 나의 최선의 방책은 무엇일까’라고 남기며 책을 마무리 짓는다. 

 

그는 일생 중 가장 불행한 순간에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고독하고 외롭게 견뎌내야만 했다. 그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였고, 또 나의 아버지였기에 이 책 어느 한 곳을 열어보아도 마음이 편한 곳이 없었다. 결국 지은이는 마지막 한 문장을 쓸 때 까지도 아버지로서 책임감을 놓지 않았고 결국 나도 모르게 ‘아 - 아버지’하고 한숨이 터져 나왔다. 슬픔이 담긴 한숨도 아니었고, 기쁨이 담긴 한숨은 더더욱 아니었다. ‘제발 그만하세요.’라고 말하는 속울음에 가까웠다. 책 속의 그는 이미 저자가 아닌 내 아버지의 모습이었기에 이순이 넘어서도 자식에게 베풀 생각만 하는 그를 말리고 싶었다. 아마 아버지의 사랑을 담기에 자식이라는 그릇이 너무도 작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보다 다그치는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사실 사춘기를 겪고 머리가 커지면서 점점 물질적인 것이 아니면 아버지의 사랑을 쉽게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책을 처음 펼칠 때만 해도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의 아이러니한 감정은 오직 낯간지러운 것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라는 단어만 들어도 이유도 모른 채 뭉클하고 눈물마저 핑 돌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제 잘못을 모르는 학생이 반성문을 쓰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덮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책을 읽고서 문득 떠올랐던 10년 전 그 때, 자식 걱정에 다리에 유리가 박히는 줄도 모르고 베란다 문을 박차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행동은 무모함이 아니라 위대함에서 비롯된 행동임을. 그리고 아버지는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자식 사랑이라는 십자가에 책임감이라는 못을 박아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의 모습과 가까웠다는 것을 어리석은 딸은 이제야 마음 속 반성문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아마 나도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될 것이다. 만약 내 아이와 나에게 10년 전 그 날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나는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자기가 잘못한 건 모르고 사슴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는 내 아이를 꼭 껴안아 줄 수 있을까? 또 이 책의 ‘그’처럼 내 아이를 위해 그 모진 일들을 다 감수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 위대해서 함부로 확신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세월이 흘러도 이것만은 잊지 않고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이 모든 일을 감수하고 살아오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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