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6003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넘어서 - 정유정, <7년의 밤>을 읽고

 

정유진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나는 이것이 매우 매혹적인 도입부인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형’이라는 짧은 단어로 인해 산 사람의 세계와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한 사람의 소속이 바뀌었음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람이 불었다.” 나 “일요일이었다.”와는 다른 시작이기 때문에 책임이 따르는 문장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주목하는 만큼 그것이 지니는 무게에 걸 맞는 내러티브를 요구한다. 나는 문득 이 같은 독자의 엄중한 요구를 충족시켜 명작이 된 두 편의 소설을 기억해냈다. “세월이 지나 총살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아우렐리오 부엔디아 대령은 문득 아버지를 따라 난생 처음으로 얼음 구경을 갔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오후를 떠올렸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그 첫 번째이며,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 그 두 번째이다. 이것은 일종의 성공담이다. 우리는 실패담을 기억하지는 않으므로 흡입력 있는 서두로 시작해 몰락한 소설의 이력을 기록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소설이 어떤 은유와 상징, 치밀한 서사를 통해 필사적으로 첫 문장의 명예를 지켜냈는지를 기억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해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장편에서 강력한 프롤로그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완수하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반대로 용두사미가 되기란 또 얼마나 쉬운지에 대해 깨닫는 일일지 모른다. 때문에 나는 <7년의 밤>을 읽으면서 그와 같은 위험을 감수하고서 강력한 출사표를 내던진 작가의 호기로움에 한 번, 소설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문학적 숭고함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대신 이를 단순한 호기가 아닌 장르 작가적 역량으로 완성해낸 잘 짜여진 플롯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몇 년간의 독서 경험을 돌이켜보아도 이처럼 묵직한 분량을 빠른 호흡으로, 정제된 문장력의 힘을 끝까지 잃지 않고, 결코 독자의 반응 따위를 의식하지 않은 채 내달리는 국내 소설을 기억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소박한 일상을 세심한 필치로 그려낸’ 작가들의 방구석에 갇힌 채로 갑갑증에 시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쉽게 싫증내고 인내심 부족한 독자인 나는 많은 것들에 질렸지만,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 주인공이 등장해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다가 인과적 필연성 없는 일을 행하거나, 연애 감정을 느끼고 “인생이란” 혹은 “사랑은”하고 포문을 여는 나른한 비유적 문장을 삽입하는 소설들에 질렸고,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소설의 득세 속에 그들 작품의 태만과 안일을 태만하다 안일하다 말할 수 없는 홍길동적인 분통함을 느끼는 일에 특히 질렸다. 개인적 독서취향으로 나는 소설 속 일상은 그만 소심하고 소박할 것이며, 반대로 ‘인생’이나 ‘사랑’과 같은 추상명사 앞에서는 작가들이 그만 용감하고 대범해지기를 바랐다. 아포리즘과 개똥철학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그 한 장이 작품의 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유정의 <7년의 밤>은 대단히 대범하지만 동시에 겸손한 소설이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뚜렷한 개성과 직업을 가졌고, ‘세령호의 재앙’이라는 사건에 충실하게 복무하면서 부모의 죽음, 마을의 수몰, 살인과 같은 그 자체로 이미 스펙터클이 될 경험을 덧입지만, 누구도 섣불리 인생이나 죽음에 대해서 사변적인 견해를 풀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독자들의 눈치를 보거나 망설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저돌적이다 싶으리만큼 거침없이 사건에 몰입하고 각자 세계의 필연성을 구축해나간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세령’이라는 소녀의 죽음을 단초로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사건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12살 이후로 살인범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쓰고 살아야했던 서원과 그 소년에게 무조건적이라 할 만한 애정을 가지고 돌보는 승환, ‘세령호의 재앙’의 최전방에 서 있는 최현수 그리고 오영제의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며 캐릭터의 깊이를 더해 갈수록, 나는 이 추리극 형식을 빌린 소설이 다름이 아닌 ‘아버지’ 더 정확히는 ‘부재하는 아버지’에 관한 서사에 다름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전통적인 주제이다. 게다가 남성 주인공들이 실체적이고 즉물적인 것에 비해 문하영을 비롯해 하영의 축소판인 세령, 그들 중 가장 현실 밀착적이고 구체적 과거를 노출하고 있는 최현수의 아내 강은주 마저도 그녀가 가진 존재감에 비해 너무도 피상적인 죽음을 맞게 되며 그 배경조차 해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영 그리고 세령과 더불어 벽에 걸린 그림처럼 회화적 인물에 그치고 만다. ‘여성성’ 혹은 ‘모성의 결핍’은 소설에 남성적 역동성과 추진력을 부여하지만, 실질적으로 이것은 치명적 약점으로도 작용한다. 왜냐하면 작가가 밖으로 표출되는 에너지와 사건에 집중하느라, 촘촘하게 짜여진 플롯의 바깥에서 사건의 중심축이 되는 남성인물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게 소설의 문학적 외연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여성 인물들을 소외시킴으로써 결국은 ‘나는 초라한 아버지의 자식으로 자랐지만 내 자식에게는 그와 같은 불운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가부장적 부성애에 관한 전형적인 주제 의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대한 서사를 조율하고 통제하는 이야기꾼 등장에 환호했던 나 같은 독자가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이기도 하다. 최현수와 오영제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매우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정상적인 부성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온전한 아버지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채 그들 부친의 외설적인 면모를 더 많이 유전 받은 ‘괴물’을 자신의 안에서 키우게 된다. 외팔이 상이용사의 비극은 ‘용팔이’라는 무능을 통해 최현수에게 유전된다. 영민하고 밝은 성격의 서원은 예외적으로 ‘실패한 아버지 서사’의 연쇄를 끊고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열 두 살 이후 끊임없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으로 살인자 아버지를 밤마다 자신의 안에서 목 매달아왔다는 점에서 언제 외면화 될지 모르는 ‘괴물’을 물려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나누어 갖는다. 비극은 반복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제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대단히 속도감 있게 읽힌다. 감정과잉이 되기 쉬운 긴박한 상황에서도 작가는 그것을 절제되고 간결한 문장으로 매우 잘 전달한다. 특히 ‘프롤로그’ 와 ‘등대마을’ 두 챕터를 읽으면 정유정이 단순히 독자의 흥미를 유발해 책장을 넘기는 재주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재담을 즐기는 이야기꾼으로서 소설 일반의 즐거움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는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위트와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주인공들을 표현해내는 성찰력은 플롯을 단단하게 함과 동시에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장르 소설 특유의 누아르적 음산함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일상과 밀착된 인물들의 면면을 위화감 없이 삽입한다. 물론 세령호 사건의 전말이 승환이 구성해낸 소설로 재현되는 부분에서는 ‘프롤로그’와 ‘등대마을’에서 느껴지던 여유로운 묘사가 많이 줄어들고 사건의 추이를 추적하는 인물들의 심리 전개 위주로 흘러가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문장을 깊이 곱씹어 볼만한 부분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그들 각각의 계급적 특성이 있음에도, 지위의 고하, 학식의 정도와 무관하게 너무도 치밀하고, 조직적이며, 객관적으로 추론하고 사건의 맥락을 짚어낸다는 점이 소설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는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서 모든 인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사건의 의문점을 풀어주기 때문인데, ‘추론이란 이치에 맞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는 점을 고려하면 누구도 헛손질을 하지 않고, 허탕을 치지 않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짜여진 플롯 안에서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스스로 완벽해지지만, 같은 이유로 자유롭지는 못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사건의 궤는 작가가 원하는 대로 톱니바퀴가 맞물린 듯이 예정되어 있는 결말을 향해 망설임 없이 전진하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닥뜨렸을 때 발생하게 되는 ‘의외성’이 주는 감동이나 여운은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정유정 작가의 최대 장점으로 일컬어지는 ‘속도감’이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7년의 밤>을 문학적이기보다는 영화적이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독자들은 매 문장을 읽어 내리면서 머릿속에 필름이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역시 긍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답답한 순수 문학에의 요구로 소설이 너무 미디어적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작가가 수수께끼의 해답을 대화나 묘사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이 아니라, 인물의 입을 통해 ‘들려주는(설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 탐정의 역할을 맡아 사건을 추론하는 재미를 느끼고자 하는 추리소설 독자들에게는 실망감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지적 시점을 통해 드러난 작가의 전능함이 일반 독자들에게 너무나 친절했기 때문에 장르 소설로서의 재미를 원하는 특정 독자들에게는 도리어 불친절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합리화하는 것은 너무 쉬운 ‘위안’일지도 모른다. 21세기 들어 이렇다 할 성취를 보여주지 못한 채 사골 우리듯 여전히 황석영, 공지영, 신경숙 등 대형작가들의 감수성에 의존하던 국내 장편 소설 시장은 정유정이라는 루키의 등장에 환호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7년의 밤>을 통해 국내 장편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 많은 출판업계 관계자와 독자들은 그녀의 소설을 읽은 후 느낀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아쉬움의 말들을 입안으로 삼키고 그녀를 옹호해주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해서 나는 그녀가 지금 자신의 소설에 쏟아지는 찬사가, 이와 같은 ‘암묵적 동의’에 어느 정도 빚지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래서 누군가는 <7년의 밤>이 추리 소설로서 실패했다고 단언하는 대신, 작가의 친절한 서술이 재미를 반감시켰노라 온건하게 돌려 말했음을, 파묵이 <내 이름의 빨강>에서 비슷한 효과를 내는 시점 혼용을 사용하고도 인물의 입을 통해 비밀을 발설하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내고 얼마나 훌륭하게 수수께끼를 완성해내 문학적 여운과 감동을 주었는지에 대해 대조하여 말하려다가 그만두었음을, 부디 눈치 채 주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다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라고 시작하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새 작품으로 우리 곁에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누구나 루키는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두다 중견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성장한 중견 작가의 노후하지 않은 소설을 읽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나는 젠체하지도, 학자연한 논리를 내세워 반감을 사지도, 그렇다고 현실을 단순하게 낙관하고 손쉽게 봉합하지도 않으면서 이처럼 꽉 짜여진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정유정 작가의 도약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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