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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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의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에서 '감사'를 습작하다

 

김서영

 

그이를 처음 알게 된 이야기를 하고 싶다. 30년을 거슬러 올라가 알싸한 바람 한 가닥이 살포시 귀밑을 스치는 어느 아침이었다. 중학교 2학년 단발머리 소녀는 교실 책상 안에서 누군가 몰래 넣고 간 책 한 권을 발견한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포장을 뜯어보니 이해인 수녀님이 쓰신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라는 시집이었다. 그 한 권의 시집으로 그 아이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시집 속에는 “내 모자란 마음을 담아서”라는 심경고백 식의 엽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시집에 수록된 여남은 통의 가을편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시집을 선물한 사람한테가 아닌 막연한 대상으로 짝사랑하게 해버렸다. 수녀님이 의도한 ‘당신’이 누구였든 내 관념 속의 ‘당신’은 절대자도, 민족도 아닌 나만의 ‘그대’였기에 이팔청춘을 앞둔 나는 짝사랑의 열병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 당장 누구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시급함 속에서 수신자 없는 가을편지들을 모방하여 하늘로 띄워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릴없고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지금껏 ‘말’과 관계된 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고 있다. 그렇게 그이는 내게 오시더니 삼십 년이 훌쩍 지나 다시 홀연히 나타났다. 

 

그러니까 지난 5월, 또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무슨 인연의 고리인지 내게 건네진 책은 그이의 최근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였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기쁨’이라는 글씨에 ‘포피’라는 빨간 꽃 세 송이가 향을 터뜨리며 표지를 장식하는 책 속에, “사랑하는 선생님께”라는 편지가 함께 했다. 나는 두 번의 조우에 조바심을 느끼며 책을 펼쳤다. 손이 가는 대로 쓴 이 글은 전체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곳곳에 배치된 스냅 사진들과 황규백 화가의 그림들이 글들과 잘 어우러져 있다. 산문집의 제목이기도 한 첫 번째 장은 이해인 수녀님의 일상의 나날을 담아 여러 곳에 기고한 단상들을 묶은 것이다. 첫 장을 지나면 마음이 있으면 어디서나 만나는 그리운 벗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곳을 지날 때는 얼마 전 본 영화 ‘써니’가 떠올라 웃고 울었다. 수도원에서의 날들을 그린 세 번째 장과, 여러 사람을 위한 기도와 묵상을 담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장을 건너가면 고인이 된 여러 지인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추모의 글을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다. 서문을 대신한 박완서님의 짧은 편지에서처럼 그이가 ‘고향의 당산나무’임을 전체 장을 통해 느끼게 된다. 앞의 내용을 놓치면 줄거리를 따라잡을 수 없는 소설과는 달리 이 글은 마음 내키는 곳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도 좋을 성 싶다. 나는 5월부터 지금까지 서너 차례 읽고 있는데, 막 다림질한 옷을 입을 때처럼 까슬까슬하고,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있는 서정시처럼 내 마음 속에 얹혀있다. 고희에 가까운 연세에 암 투병 중이시면서 이렇게 단아하고 정갈한 언어를 품고 계시는 그이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해맑은 소녀이며 우리의 누이이자 어머니이셨다.

 

감사만이/ 꽃길입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걸어가는/ 향기 나는 길입니다//로 시작하는 <감사예찬>에 나는 전율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내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것에 대하여 새롭게 감사하고 기뻐한다. 기도 시간에 기억할 사람이 많은 것도,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하루 세 끼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또 새롭게 기뻐한다.’라는 깨알 같은 문구에서 나는 차마 부끄러웠다. 아침에 눈 뜨면 자고나도 천근만근인 내 삭신을 한탄하고 식구들이 주렁주렁 딸려 아침밥을 지어야하는 일에 불평한다. 어떻게 기도하는 지도 모르고, 어쩌다가 기도랍시고 하는 것이 ‘우리 아이들 잘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복 기도가 전부이고 남이 해주는 밥도 복에 겨워 싱겁니 짜니 하며 투정한다. 아이들의 밥투정에 짜증을 내는 내가, 아이처럼 밥투정하며 짜증을 낸다. 출근하여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은 업무에 넌더리내고 아이들을 닦달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살아왔다. 감사해야 할 일에 대해 당연지사라 생각하고 무표정하고 무덤덤하게 살아온 나의 자화상이다. 시는 계속된다. 감사만이/ 보석입니다// 슬프고 힘들 때도/ 감사할 수 있으면/ 삶은 어느 순간/ 보석으로 빛납니다// 

 

두 달 전 불의의 사고로 입원해 계시는 엄마를 주말마다 간호하러 간다. 식은땀을 흘리시며 흥건히 잠드신 엄마의 주름진 얼굴과 검버섯이 난 두툼한 손, 살을 파고든 손톱과 그 밑에 낀 시커먼 때를 보면서 나는 엄마가 살아온 삶에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졌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이 엄마가 차려주셨던 따스한 밥상만이 아니다. 엄마는 이제 ‘노후에 흙을 주무를 수 있는 기쁨’도, 내 아들딸의 생일날 두 손 모아 빌어주실 수 있는 할미로서의 보람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워’ 잠시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어 꼼지락거리던 엄마가, ‘나락도 다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할 일흔이 넘어 화를 입으셨다. 슬픈 엄마에게도, 슬픈 엄마를 감당해야하는 우리에게도 그이는 감사하라 하신다. 삶을 보듬으라 하신다. 감사하면 삶이 빛난다고. 수녀님은 성당에서 조용히 하느님이나 성모 마리아에게 ‘청원’기도만 드리시는 줄 알았는데, 되레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가고 오는 시간에 대해, 만나고 헤어짐에 대해, 봉사할 수 있었음에, 받은 비난에 대해, 예기치 않게 찾아온 질병, 고통, 슬픔에 대해, 살아있음에 대해. 마치 감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말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마음에 화상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 누군가를 알게 모르게 상처 입히는 사람, 어머니가 그리워 사모곡을 부를 사람, 누구를 떠나보내어 마음 아픈 사람, 친구가 그리운 사람,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고달파서, 메말라져서, 빨라져서 힘든 사람, 문득 인생이 외로운 사람은 그이의 맑고 정갈한 언어를 읽자. 연고를 바른 것처럼 상처는 아물어 새 살이 돋아날 것이고, 갓난아이를 볼 때처럼 미소가 살아나며, 척박한 내 마음의 영토에 민들레 같은 노란 등불이 켜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삶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전하는 복음서며 삶의 체험을 진솔하고 짧게 표현한 아포리즘이다. ‘~하는 법’, ‘~하기’ 류의 처세에 관한 책이 유행하는 요즘,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캐묻지 않아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강요하고 설득하지 않아서 좋다. 책을 읽는 기쁨 중의 하나는 책 속에서 다른 책을 소개받는 일인데 그이는 월하노인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셨다. 그이의 소개로 타고르, 천양희, 김용택, 천상병, 홍윤숙, 랄프 왈도 에머슨, 도종환, 정일근, 정진규, 오르탕스 블루, 윤보영, 고은 등을 다시 만났거나 처음으로 만났다. 그이는 자신이 시인이면서 그 시인들의 시를 즐겨 읽고 감탄하였고 더불어 나도 시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책에 밑줄 긋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아름다운 시구와 글들을 형광펜으로 칠하면서 어린아이처럼 행복했다. 이제 알 것 같다. 그이가 왜 내게 왔는지. 모처럼 찾아온 그이는 삼십 년 전처럼 내 마음을 짝사랑으로 쿵쾅거리게 하지는 않았지만, 하늘로 날릴 시를 습작하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어버린 내게 말씀하신다. 감사만이/ 기도입니다// 기도 한 줄 외우지 못해도/ 그저/ 고맙다 고맙다/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 날/ 삶 자체가/ 기도의 강으로 흘러/ 가만히 눈물 흘리는 자신을// 보며 감동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습작하며 가을햇살에 잘 영글어갈 작정이다. 주말에 엄마를 뵈면 이 시를 읽어드리고 엄마의 흐르는 눈물을 잘 닦아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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