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6953

 

낮과 밤의 이면 - "어둠의 저편"을 읽고

 경남 남해군 남해읍 남변리 김선연

 

 

 

“탁탁탁”, “부~웅”, “째깍 째깍”, “지~이잉” 밤의 세계는 낮의 세계와는 다른 냄새가 난다. 낮 동안 무르익은 긴장과 갈등이 밤의 맹주 어둠에게 그 힘을 차츰 빼앗긴다. 그러면서 생기는 타락과 낮은 으르렁거림은 어둠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낮과 밤은 인간의 나약함과 잔인함으로 구분되는 얇디얇은 선 위에서 곡예를 하는 것과 같다. 인간들의 갈등과 비굴함, 그리고 획일적인 모습을 행하는 것이 낮이요, 어둠마왕의 망토 뒤에 숨어서 잔인함과 난폭함 그리고 일탈을 행하는 게 밤의 모습이다.

 

우린 항상 24시간 사물의 시선에,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다. 낮과 밤의 자각을 못하게 하는 환한 불빛에, 골목골목의 CCTV에, 감기지 않는 검은 두 눈에, 소리 없이 사방을 메우고 있는 시선에, 이처럼 꺼지지 않는 24시간 동안 원초적인 모습으로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다. 그러나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오로지 무의식으로의 도피만 가능할 뿐. 아니 아사이 에리는 그 무의식마저 다른 존재에게 관찰되고 관여 받고 있다. 현대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를 감시하면서 서로를 무심히 넘기고 있다. 감시와 무관심은 서로 등을 돌리면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마치 마리와 에리처럼.

 

그들은 서로 껴안고 있으면 서로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에리의 깊은 잠은 눈뜬 자들에겐 안식과 평안이다. 정작 무의식 속에서 에리는 그 네모난 방에 가득 찬 냉랭함과 볼 수 없는 시선과 입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친다. 나 역시 환한 불빛이 있는 그 방을 감시자 아닌 감시자로 보고 있다. 마치 재미난 영화를 보는 것처럼 팝콘을 먹으면서, 다음 장면을 기다리면서, 어쩜 좀더 자극적이고 좀더 잔인함을 생각하면서 동물적인 눈을 번득이고 있는지 모른다. 단지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뿐 정작 마음에서 일탈을 꿈꾸고 있다. 나에게 금지된 것을 꿈꾸면서. 금지된 것이 주는 묘한 짜릿함을 즐기면서 방을 주시하고 있다. 에리의 터져 나오는 시위나 발버둥은 깡그리 무시 한 체 그저 보고 있다. 또한 마리는 밤까지 잊은 체 아니 밤을 무서워하면서 그 속에 침식당하지 않기 위해서 깨어 있다. 혼자만의 밤의 여행은 또 하나의 자기 도피이지만 누군가의 입김으로 움직이는 삶을 거부하는 모션이다. 그러나 그 역시 삶의 피해다. 혼자만 인정하기 싫은, 어쩜 마리는 시선에 관심에 목말라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에리와 마리를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서로 너무 다른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팽팽한 긴장감, 사람들에게 아직 희망이라는 녀석이 숨어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다카하시는 인간이 인간에게 있어 서로 높낮음이 없음을 그리고 두 사람이 자매이고 두 사람이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인가에게 서로를 갈망하고 원하는 얇은 선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걸 말한다. 그 선 때문에 인간은 서로를 동정하고 서로를 보듬고 갈 수 밖에 없다는 걸 알려준다. 마리가 알파빌에서 폭행을 당한 중국 소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에게 피해를 입었지만 인간만이 희망이라는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쩜 중국소녀가 자신이며 에리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소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처를 보여주고 에리와 자신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에 폭행을 당한 차이 뿐. 

 

세계는 밤을 통해서 낮 동안의 분노를 표출한다.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도 밤에는 어떻게 변하는지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준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가정에서도 인정받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시라가와는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밤의 어둠을 등에 업고 폭력을 저지르고 매춘을 저지른다. 퇴근길에 자상히 부인이 원하는 우유를 사가는 남자의 무시한 폭행에 놀란다. 그래서 그 속에 뛰어 들어서 저 우유를 사고 있는 사내가 중국소녀를 폭행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왜 저 사람은 나의 상식과 법규에 어긋나는 사람일까, 그는 나의 세계에선 나쁜 사람이기 다시는 못된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싶다. 하지만 멈칫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역시 시라가와처럼 폭력을 행하고 있지만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도 누군가에겐 가해자이며 또 피해자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폭발인자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폭발음을 내면서 터지냐 내지 않으면서 터지냐의 차이만 있을 뿐.

 

한 부모의 뱃속에 태어난 자매이지만 다른 에리와 마리처럼 현대사회는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면서 그것을 존중하면서도 획일적이고 똑같아지길 바란다. 하지만 사람은 제각기 다르고 또 그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선,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선 자기 역시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무엇인가를 주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책에서 보여지는 기묘한 군상들을 보기 위해서 우선 생각은 접어두고 카메라를 열심히 따라 다녔다. 과연 밤동안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정상일까 정말 저런 모습의 일들이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고 더욱 두려웠다. 그런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다양한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쉽게 옆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사회성에 벗어난 사람, 이단자 같은 모습은 아닐 것 이라고 머리를 흔들지만 사실은 나역시 이들과 같은 선상에 있음을, 그 사회의 일원임을 알게 되었다. 

 

왜 어둠을 틈타서 그들은 울부짖고 있는 걸까? 나에겐 그들의 모습이 마치 속시원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남들의 생각을 모른 체 서로에게 시뻘건 잇몸을 드러내어 서로를 비방하고 뜯어 먹는 한 마리 짐승처럼 다가왔다. 사실은 스스로들 비겁함을 나타내는게 무서워서 숨기고 있는데 그 방법으로 폭력과 어둠의 뒤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나 역시 세상이 겁난다고, 단지 그걸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사람들은 다들 폭력을 행하고 자신을 학대한다.

 

책 속에 인물들도 자신을 숨기는데 급급하다. 마리와 에리도 서로에 대한 감정을 어두운 엘리베이터에서 꼭 껴안았을 때처럼 그 감정을 표현했다면 밤의 장막에 갇혀서 맴돌진 않을 것인데...... 근데 참 묘하다. 그들의 아픔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왜 가슴 한쪽이 찡하면서다시 해보자는 맘이 생기는건 왜일까? 하루키가 말하려던 것이 이것일까? 어쩜 이 모든 폭력과 불행은 낮과 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 인간들의 죄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분명 예전에 틀렸을 낮과 밤인데.... 

 

지금 우리는 낮과 밤의 상반된 이면에 살고 있고 그 시스템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고 있다. 쉴새없이 몸과 정신은 24시간 깨어 있다. 그 깨어 있는 목적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스트레스 해소라는 이름의 유흥으로 우리 몸을 죽이고 있다. 몸을 죽여가면서 얻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한다. 몸을 혹사시키면 자신들의 목적에 더 빨리 도달 할 수 있다고 착각 하고 있다. 그것이 더욱 스스로의 가치를 죽이고, 기술 문명의 억압에 익숙해지는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다시 희망을 가진다. 무엇을 위해서 살고 무엇을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지를 가끔을 깜박하지만 우린 목표를 가진다. 나 역시 아주 어릴 때 가졌던 나의 꿈 위에 쌓인 뽀얀 먼지를 털고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 그 기억으로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되고 다시 꿈을 꿀 수 있었다.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이고 풍파에 치이고 그러면서 어느 순간 소심해지고 삶에 안주하게 되었다. 가끔 술 한 잔에 세상을 향해서 울컥 터지는 욕 한번 시원하게 뱉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체스츄어였는데, 이 책을 통해서 좀더 적극적이고 내가 주체가 되고 내가 아직 꿈을 포기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다.

 

고오로기 말한 것처럼 기억의 연료로 산다는 게 아마 우리 할머니들이 자신의 젊음을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거나 웃음을 지을 때 필요한 것 같이 나 역시 어릴 적 가졌던 꿈 때문에 얼마나 행복했고 얼마나 힘들어했고 그것을 다시 곱씹으면서 맘을 훈훈하게 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여행, 기억을 연료로 쓰는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어서 낮의 이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밤의 여행에서 마리가 에리와 서로가 끊을 수 없는 연결선을 확인하고 에리를 꼭 껴안는 그 모습에서 울컥거림은 나 역시 잃어버린 나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그 시간에 나의 가족과 나의 친구와 나의 꿈이 있었다는 걸.

 

시선에 신경을 쓰는 노출증과 남을 관찰하고 시기하는 관음증에 걸려버린 이 시대의 사람으로서 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이며 불쌍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주체이면서 비주체였던 생활들이 계속되는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인 삶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명의 이기에 모든 것을 내맡겨 버린 삶은 주체가 아니었다. 유행을 따르고 군중 속의 안전이 진정한 안전이 아니었다. 내 몸과 마음을 아낄 때 나의 생각을 주장하고 이야기 할 때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그런 삶을 우린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밤에도 낮에도.

 

책의 마지막 말처럼 아직은 시간이 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좀더 몸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 내가 꿈을 찾을 수 있는 시간, 기억을 꺼낼 수 있는 시간,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시간. 우린 스스로를 위협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스스로를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편리함 속에 문명의 이면에 숨어서 서로를 죽이는 그런 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여유 없는 모습과 사람들의 번득거리는 시선과 쉬지 않고 돌아가는 24시간 때문에 우린 더 잠들지 못하고 있다. 어느새 우리보단 너와 내가 되어버린 세상, 그 속에서 살기 위해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세상도 잠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폭력을 낳고 있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스스로를 잠재우고 세상을 잠재울 수 있는 해답을 알고 있다. 

단지 그것을 외면했을 뿐.

 

아직은 시간이 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스스로 마음에 기억에 몸에게 말하라. 어둠의 저편에는 아직도 시간은 있다고. 

나만 시작한다면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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