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5052

거울 속에 비춰진 상속, 그림자

<상속>를 읽고 

                                                                                      서울시 도봉구 창3동 고지숙


 

세상에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들이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리고서 검은 수면으로 숨어버린 시간, 홀로 꺠어나 거울앞에 선 적이 있었다. 영혼을 수면 위로 끄집어낼 정도로 두려운 악몽 떄문인지, 단지 급한 갈증 떄문이었는지는 지금 잊어버렸지만, 인간의 몸짓을 조롱하며 웃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만은 기억의 변두리에 선명히 남아있다.이제 서른을 넘기고 험한 세상의 거친 등허리를 조금은 타고 넘을 준비가 된 내 얼굴 위로 겹쳐지는 그림자가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노동으로 지치고 눈물과 땀에 절은 얼굴과 손으로 살아오신 내 어머니의 그림자였다. 어릴적부터 닮았따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는데, 구불구불 펼쳐진 세월의 길을 걸으며 나는 어딘지 모르게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었다. 겁이 많아 보이는 순한 눈동자와 굵은 손마디, 한밤중에 일어나 차가운 물을 마시는 습관과 모서리에 잘 부딪치는 것까지도...은희경이 말하는 '상속'이란 이런 것일까.


 낡고 오래된 옷을 걸친 세대가 제육신을 버리고 영혼을 거두어도 소멸되지 않고 따뜻한 피를 타고 혈관으로스며들어 다음 세대의 강으로 흐르는 것. 결코 우수하다거나 올바르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같은 것.오랜만에 읽은 은희경의 새로운 소설은 나를 잠시 혼란스럽게 했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등 그녀의 소설을 거치면서 특유의 재치와 가벼운 듯 세련된 냉소에 억눌린 가슴이 뚫리는 통쾌함을 느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곤 했는데, [상속]은 오히려 침묵의 서약처럼 가슴 한구석에 굵직한 기둥 하나를 세우게 했다.얇은 입술로 쉴새없이 무거운 삶을 재잘거리며 가벼이 허공에 띄우려 애쓰던 그녀가, 이제는 말로 풀어버리고 싶은 삶을 목구멍 깊은 곳에 묻어두고 호흡이 가빠지거나 맥박이 약해질 때만 가느다란 한숨으로 조금씩 뿜어내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입술을 걸어 잠그니 사방으로 흩어졌던 언어의 파편은 맑은 공기가 되어 하나의 정신으로 모아진다.[상속]에 수록된 여러 단편들 가운데서도 '상속'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다른 모두를 하나로 안을 수 있는 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열성유전자의 지배를 받아 스스로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느다]와 [딸기도둑], [아내의 상자]의 인물들과 억지로 꾸며진 무대장치 속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큼 인위적이고 과장된 몸짓을 해야 하는 [어느 봄날에 리기다소나무 숲에 누가 덫을 놓았을까]와 [태양의 서커스]의 인물들의 슬픈 숙명은 [상속]에서 어느정도 해소된다. 다양한 이문들과 제각기 다른 가지로 뻗어나간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그 속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상속'이라는 단어 속에서 하나의 잎으로 펼쳐지로, 처음과 끝이 명확하지 않은 실타래는 미궁 속을 헤매이다 결국 '상속'에서 제대로 길을 찾게 된다.


해야할 일을 모두 마친 뒤, 엄숙한 표정으로 축 늘어진 힘없는 아버지의 성기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은 미궁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발견해냇으며 아버지의 꿈에서 보였던 단란하고 소박한 가족의 모습에서 나는 힘겨운 삶에 쉼표 하나 찍을 수 잇는 여유를 엿볼 수 있었다. 성경의 가르침처럼 원죄의식을 가진 인물들은 삶의 질곡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희망은 살아있다.


[내 고향에는...]의 윤준형은 태어날때부터 심한 말더듬이었으며 눈치도 없고 요령없는 팔삭동이이다. 거기에 자신의 신체적 결함이 돋보이게 할 이름까지 덧붙여졌으니 그야말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집이 망하고 이사를 하고 어머니의 타락과 친구에 대한 배신까지 겪고서 선택한 머나먼 가출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앙갚음이자 도전이다. 열성이기에 사는 것이 힘에 부치는 이들이 선택 할 수 있는 삶의 방식 가운데서는 가장 소극적인 표출방법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윤준형의 마지막 모습에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더욱 극단적인 행동으로 분노를 터뜨리는 인물은 [딸기도둑]의 은혜이다. 


무의식에 스며든 원죄에 대한 분노를 가진 은혜는 무기력하고 생기잃은 생활속에서 동명의 어릴적 은혜를 만나게 되고 숨기고 싶은 비밀과 아픈 상처를 건드린 그녀에게 죄를 물어 벌한다. 먹음직스러운 선악과에 이브가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나듯 주인공 은혜는 새빨간 물이 손을 적시는 탐스런 딸기를 욕심낸 탓에 '딸기도둑'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죄는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낙인을 은혜의 치부에 새겨놓았기에 그녀는 착한 삶에서 제외되고 만다.자신을 타락시킨 딸기를 짓이기듯 사람을 해한 은혜의 넋두리에는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방식은 [아내의 상자]에서도 이어지는데 열성인자를 가졌기에 거세되어 불임이 되었다는 아내의 외침은 언제나 상자 속에 묻혀지고, 그러기에 희망없고 생명력 잃은 아내의 몸은 언제나 의자 깊숙히 누워있다. 사슬에 묶인 개처럼 일상의 마른 먼지를 털어내던 아내는 수분을 모조리 빼앗기기 전에 삶에 분노를 표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자기파괴적이었기에 그대로 정신병원에 가둬진다.이렇드 세편의 소설은 암흑으로 걸어들어가 빠져나오지 못할 커다란 미궁을 언뜻 제시한다.

 하지만 [상속]에서 그들의 원죄의식은 한사람의 죽음을 통해 속죄되고 간병인에 의해 감춰진 손은 그보다 더 가족을 이해시킬 수 있는 살아남은 눈으로 해소되면서 목을 죄고 있던 사슬은 조금 느슨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가 암흑으로 건너간 후, 남은 가족들의 생활이 그리 원활하고 건강하게 흘러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꿈에서 보았던 운동화와 어린자녀들의 환영은 원죄의식을 벗어난 이들의 결말이다.


인간을 죄는 사슬은 삶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뻗어져 있는데, [어느 봄날...]의 소라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연기를 하듯이 언제나 어색하고 과장되어 주변 사람들도 자신도 힘들게 했던 그녀는 바라보고 있는 자신과 보여지는 자신 사이를 방황하며 소연과 소라의 역할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서툰 삶을 살아간다.[태양의 서커스]에 등장하는 뚱뚱한 여자가 너무 과장된 몸짓을 하기에 서럽듯이 소연 혹은 소라의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그녀도 슬픈 초상으로 그려진다.


[상속]의 아버지도 자신의 초라한 몸뚱이를 감춰줄 거대한 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결국 딸에게 자신의 치부를 보이면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영혼이 떠나면 한줌으로 흩어질 육신의 참모습을 진실의 거울에 비추지 않으려고 화장을 하고 갑옷을 입고 결국 가면까지 덮어쓰고.스스로 선택하는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삶이다.


 죽음을 마주하고 가면을 벗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은 평화로운 빛에 감싸인듯 보인다. 

죽음은 이세상에 마지막으로 바치는 공양 아닌가. 그 공양 드시고 봄바람이 푸르게 들판을 일으켜 날아 오른다. -[그래도 나는 살아 가리라 <솔출판사> 저자 유용주]이렇듯 죽음은 비극이 아닌 기쁨이며 새털처럼 가벼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대로 끝나지 않고 피를 타고 거울 앞에 선 뒤이은 이들의 얼굴을 흘러 늦은 밤. 소풍나온 기분으로 맞을 수 있기에 죽음은 더이상 파멸이나 원죄에 대한 복수가 되지 못한다. 전화기 옆에 놓인 빛바랜 사진에는 젊은 어머니와 어린 내가 웃고 있다. 어색하지만 행복이 깃든 미소이다. 거울에 선 나와 젊은 어머니를 번간아 쳐다본다. 닮지 않았지만 닮아있다.피부며 머리카락이 다르지만 혈관을 흐르는 따뜻한 피가 닮아있다. 칠흙같던 밤이 걷히며 창이 조금씩 밝아온다. 상속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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