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6735

 

 

기억이 삶을 만지네 - "어둠의 저편"을 읽고

경남 진주시 초전동 서진혜

 

기차는 쉴 새 없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설명을 하자면 너무 길었고, 명확하지도 않았다. 그냥 집안일이 복잡해졌고, 연봉이며 직장 내 복지제도 따위를 운운하며 취업에 목매야 하는 대학교 마지막학년이라는 현실도 짜증났다고 할까. 그러니까, 나는 지쳐있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한창 즐거울 때라고 알려준 그 나이에.

어째서 그 많은 여행들 중에 가족들과 함께 했던 여행만이 가슴속에 뿌리를 내리고, 진득하게 향수를 피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추억 속에서 힘차게 손짓하는 그 때 그 곳으로 개처럼 맹목적인 코를 킁킁거리며 찾아가도, 그 곳은 기억 속에서만 아름다웠던 평범하기 그지없는 곳일 뿐이다. 순진 무구란 얼굴로 웃는 엄지손톱만한 나도 없고, 당시 유행하던 촌스러운 옷을 입은 엄마도 없고, 커다란 잠자리 눈 보잉 선글라스를 쓴 아빠도, 주름진 입가가 다 펴지도록 웃고 계신 할아버지도 없는 그 곳은 사진첩에 꽂힌 사각의 틀 안에서만 즐거웠던 곳이다. 어지럽도록 내리쬐는 가을볕과 마른 풀의 향기, 치열한 풀벌레소리, 그을음이 묻은 가을 내음....... 추억이 머물렀던 자리의 냄새가 스며왔다.

하지만 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돌아오는 기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꿈처럼 잡히지 않는 기억과, 엄연한 부재만 남은 현실간의 틈새를 온몸으로 받으며.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슬퍼졌다. 바깥풍경을 덜컹덜컹 긁으며 달리는 낡은 기차 속에서, 대체적으로 우리들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더더구나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먼저 행동을 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한순간의 망상에 대한 싸구려 분석을 구겨 넣고,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 내 서점에서 샀던 ‘어둠의 저편’을 펼쳤다.

사춘기는, 겨울동안 먹을 음식들을 항아리에 담 듯, 사소한 일 모두에게 절박을 담는다. 지나치게 감상이 묻은 그것들은 느닷없는 생의 사춘기 앞에서 종종 끝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핵이라든가, 컴퓨터의 진보, 인공수정, 첩보위성 등으로 세상은 점점 복잡해져가고, 시대의 역설은 점점 늘어만 간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고,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졌고,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너무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전은 너무 많이 본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었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이런 시대에 맞춰가기 위해, 점점 발달하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어쩌면 나 역시도 아사이 에리 만큼이나 슬금슬금 주체성을 갉아 먹히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고오로기의 이야기가 위로를 머금은 바람이 되어, 불분명했던 출발과 그리하여 실패한 여행길,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얼마만큼의 환상과 또 얼마만큼의 직시, 그 어떤 부재에 대한 서글픔을 가만히 덮어왔다.

어쩐지, 내가 다시 한번 처음부터 살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인생을 더듬어대며 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나 자신이 되는 것 말고는 또 다른 길이란 없다. 내가 몇 가지의 실패를 겪고,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버리고 내가 아무리 사람들을 버려도, 온갖 아름다운 감정과 뛰어난 자질과 꿈이 소멸되고 제한되어 간다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 이외의 그 무엇도 될 수는 없다. 내가 좀 더 어렸을 때는, 마치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나의 자아에 어울리는 더 유익한 삶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오직 지금의 나만을 안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망설이고 몇 번을 주저앉기도 해 온 시간들이지만, 나를 움직여 호흡하게 하는 것은 다만 나 자신, 내 마음, 내 자아의 주체성이었다. 마음이란 너무도 불완전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우리 들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더듬듯 그 흔적을 다시 더듬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 닿는 것일까. 분명, 나 자신에게로 닿는 것 일거다. 그것을 ‘기억’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동력으로 현실을 살아간다. 그 ‘기억’이 없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닿을 수가 없다.

나는 ‘어둠의 저편’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앞두고 깜빡깜빡 들었던 엷은 잠 속으로, 훼손되었어도 영원히 유지되고 끊임없이 증식하는 무수한 기억들과, 먼 시간 너머의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햇볕이 드는 아침이면 화투장으로 재미삼아 하루 운세를 점치시곤 하셨다. 화투장을 뒤집는, 항상 희미하게 떨리던 할아버지의 손은 곧잘 어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고, 그것은 길을 걷다 문득 떠올린 불행마저도 잠잠해지게 만드는 다행스러운 손이었다. 집안문제로 잠시 할머니 집에 맡겨졌던 7살 아이에게 친구도 놀거리도 없는 시골은 외롭기많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도 좋기는 했지만, 그저 하루라도 빨리 엄마, 아빠 곁으로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쪽쪽-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박하사탕을 빨아먹던 내가 ‘할아버지’하고 불렀다. 할아버지는 화투장에서 거둔 시선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셨다. 깊고 오래된 눈동자가 나를 인자하게 바라보자, 하고 싶었던 말이 그만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나는 괜히 옆에 있던 박하사탕 봉지를 만지작거리며, ‘이거 하나 더 먹어도 돼요?’ 라고 말했고, 할아버지는 그래라 - 하고 잔잔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박하사탕을 하나 더 입에 문 내가, ‘할아버지’하고 괜히 한 번 더 불러보아도 할아버지는 귀찮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기뻤고 또 슬펐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수로를 따라 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 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 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 날개의 무늬 따라 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눈뜨면 여느 나비와 다름없이 

그는 소리 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 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얕은 잠이 먼 바다처럼 물러갔을 때, 나는 서럽고 또 서럽게 울었다. 철길을 달리는 소음 속에서 내 울음소리는 연약하게 묻혔다. 기차역에 도착할 때까지 쉼 없이 울어서 우울한 감상과 내 못난 나약함이, 그리고 은밀하게 삶을 덮고 있는 수동성과 어둠이 몸에서 빠져나가도록. 그리하여 내 순수한 기억과, 지지 않고 세상을 걸어 나갈 수 있는 의지만이 고스란히 남아주기를. 중국으로 떠나는 마리도, 곧 깨어날 에리와 법률가의 길을 걷게 될 다카하시, 그리고 더 많은 감정과 기억과 현실 속으로 뛰어들게 될 나 역시도, 미약하더라도 조금 더 성장하여 발돋움 해나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우리들의 삶에 느닷없이 어둠이 침범하더라도, 잠재된 내면의 어둠이 슬며시 고개를 들 때에도, 시간의 저편으로부터 꺼내든 반짝반짝 빛나는 기억의 조각들로 오늘이란 하루를 다시 한번 다행스럽게 걸어 나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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