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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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보여주는 영우의 기적 - "루모와 어둠속의 기적"을 읽고

부산 국제고 1학년 박주영

 

  

 

밤이 깊었다. 방금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고, 이야기는 끝이 났다. 지금이 몇 신데 밤이 깊었냐고? 글쎄, 시계 따위는 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난 지금이 ‘루모’시인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루모’시란 맘 편하게 「루모&기적」 을 획획 읽어 나갈 수 있는 소음 없는 네 시간, 즉 세상의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학교에서라면 야간자습 시간일 7시부터 11시까지를 말한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루모&기적」 을 읽는 내게 가장 이상적인 시간이 ‘루모’시다. 

 

글을 읽으면서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코웃음 칠지 모르겠다. 세상에는 정해진 기준의 시각과 시간이 있는데, 어째서 마음대로 시간의 이름을 바꾸어 사용하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겠다. ‘애초에 시간의 정의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졌으니까, 내가 책장을 넘기며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간을 내 편리대로 부르는 건 상관없지 않느냐. 게다가 「루모&기적」 같은 책을 읽는 시간을 평범하고 식상한 시간으로 부른다면 그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그렇다. 나는 「루모&기적」 이 충분히 그런 영예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이 잘나고 작가가 잘나서가 아니다. 책에 나오는 인물들, 그 살아 숨쉬는 피조물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볼퍼팅어, 린트부름의 공룡들, 외눈박이 거인, 헬링. 그 밖에도 수많은 종족들이 환상의 대륙 차모니아에서 각자의 역사를 쌓아간다. 작가에게서 인간과 다를 것 없는, 아니 인간보다 더 뛰어난 그들 각각의 능력, 감정, 의지를 부여받은 채로. 그래서 여타 다른 책들과는 달리 차모니아에서는 인간이 아닌 그들이 주인공이다. 

 

인간이 없기 때문에, 아니,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특히 볼퍼팅어들, 린트부름의 공룡들이 돋보였다. 늑대와 노루의 결합, 그리고 문명화된 공룡. 그들은 ‘인간’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동시에 차모니아 대륙인들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동물적이고 야만적이다.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 그것 때문에 나는 책을 읽다가도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생각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동물의 재능, 괴물의 능력, 그들은 정말 선택받은 ‘인간’ 주인공들이 틀림없었다. 

 

특히 차모니아 대륙 최강의 전사들인 볼퍼팅어들은 축복받은 존재들이라 할 만 했다. 작가는 그들에게 많은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인간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가 하면, 냄새나 소리로 볼 수 있고, 본능적인 전투 능력은 외눈박이 거인들을 쓰러뜨리거나 누르넨을 처치하고 얼음유령들과도 대적할 수 있게 했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영웅’의 면모를 모두 갖춘 셈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선망의 대상인 볼퍼팅어들이, 그들 자신의 눈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종족이라면? 아니, 애초에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능이 세상에서 말하는 영웅의 표준조건인지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줄곧 출연하고 있는 루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영웅인 루모. 그러나 정말로 루모는, 그리고 볼퍼팅어들은 그를 영웅으로 볼까? 이쯤에서 루모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루모는 평범하다. 오히려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하고 단순하다. 누가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남녀도 구분하지 못했고,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 중에는 못하는 과목, 싫어하는 과목도 있었다. 다른 볼퍼팅어들과 똑같이 어렸을 때 버림받아 성장한 후 은띠를 향해 볼퍼링으로 흘러들었다. 그는 몇 가지 특별한 행동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특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 그가 특별한 영웅적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본능과 볼퍼팅어로서의 재능, 실수(누구의 실수이든 간에), 결단력과 순진함 때문이었다. 

 

적어도 볼퍼팅어에 한해서는, 루모의 상황에 처한다면, 다른 누구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루모의 친구들도 어렸을 적에는 루모 못지않은 일을 겪으며 볼퍼팅으로 들어왔지 않은가. 물론 그 강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루모 혼자서만 고비를 겪고 살아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영웅은 누구나 될 수는 없다. ‘나는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움츠러드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심한 난쟁이가 아니라면 어느 때고 마음을 부풀려 거인이 될 수 있다면, 그게 볼퍼팅어든지 공룡이던지 호문켈이던지, 심지어 상어구더기라고 해도,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볼퍼팅어들의 영웅학 수업에서 배운 것처럼 꼭 칼을 들고 적과 싸워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이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그것이 예술이던지 노동이던지,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정의를 보여준다면 그가 바로 영웅인 것이다. 그건 그가 가진 능력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려는 마음이 있다면야 이미 영웅이 될 준비는 끝난 셈이다. 발터 뫼르스, 이름을 듣자마자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작가. 한글 제목 사이에 조그맣게 새겨진 독일어를 볼 때마다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던 책 표지. 발그스레한 얼굴로 어둠 속에서 커튼을 젖히고 밖을 빠끔히 내다보는 어린 루모. 루모는 책을 집어든 독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자신의 성장과 사랑을 통해, 그 연대기가 담긴 R자 붙은 서랍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어둠이 무엇이고, 그 기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말이다. 나는 그 기적을 보았고, 느꼈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그 빛줄기를. 하지만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책을 읽어야 할 독자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내게 와는 다른 느낌으로 기적을 보여줄 루모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그들이나 나를 내 ‘기적’ 안에 가둬둘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이제야 독후감이 끝났다. 지금은 몇 시일까? 여전히 ‘루모’시다. 책을 덮고 나서까지 아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루모&기적」 , 그 기적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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