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5055

삶이 유연해 지는 동화, 하지만 거짓말 같은 이야기

                                                                          <누리야, 누리야>를 읽고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성용구

 

 

오래 전 콜버그라는 지식인이 도덕지수를 운운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결손가정에서 잃기 쉬운 도덕지수는 곧바로 사회문제로 이어져 많은 범죄행위를 양산한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러한 도덕지수는 아버지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나는 과연 그럴까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내면서도 내심 아버지의 도덕 지수를 나의 그릇된 행동과 결부시키곤 했다. 깊은 열등감이나 자괴감에 빠졌을 때 곧잘 나는 유전적인 자질과 환경적인 영향으로 인해 이 지경에 이르렀노라고 볼멘소리를 냈으며 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 역시 그다지 열정적으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작가 양귀자가 본 누리는 편지라는 매개를 통하여 한번 걸러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친숙하게 우리 일상사의 인물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작가는 그 현장감의 감동을 더욱 살리고 싶었던지 소설의 인위적인 허구성과 각색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 부단히도 현실 속의 누리를 강조하는 듯 보였다. 

 

돌리지 않고 말해서 누리 같은 삶은 감동적인 소재가 될 수는 있어도 소설 속에서 한 번 걸러진 감동에 의한 감동은 사실 현실감이 없다는 말이다. 설사 구태의연한 감동이 제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 감동 이상의 교훈까지 찾기에는 동화를 받는 우리들의 가슴에 너무도 가짜가 많다는 말이다.

'누리야 누리야’는 분명 아이들을 위한 동화임에 틀림없다. 동화 속에 나오는 서커스 얘기를 읽으면서 아이들은 "그게 진짜 있는 일이에요? ” 라고 반문을 했고, 책을 덮으면서도 아이들은 앞을 다투어 " 그래서 누리는 어떻게 되었어요, 엄마하고 만났나요? ” 하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어른인 나는, 적어도 아이들의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지 못한 어른 중에서 선별된 나는 이야기의 결말이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대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냥 누리의 현실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고 거부할 수 없는 일이고, 어쩌면 나 역시도 지척(咫尺)에서 경험했음직한 일들이기 때문에 굳이 결말의 소중함과 의의를 찾을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책을 덮은 후 곰곰이 아이들과 어른들의(어른들 중에서 선택된 몇몇 어른) 발상의 차이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너무도 단세포적인 요약일 수 있겠지만 그건 권선징악의 자연스러운 결말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점이었다. 아이들은 불의가 반드시 무릎을 끓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性情)이었고 나는 불의가 승리하고 정의가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다는, 어쩌면 대부분 그렇게 된다는 비관적인 의식(意識)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이들보다 현실적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었다. 현실은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다분히 상대적으로 변하는 이 현실 속에서 분명하게 아이들 역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적어도 공평한 정의는 상식과 공동체의 윤리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나 역시 어릴 적에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를 앞으로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부끄럽게 말했다. 그러면 생각하기 좋아하는 영악한 아이들은 내게 이렇게 되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선생님은 정의(正義)가 무릎 꿇었을 때 어디 있었어요? ” 

 

그러면 나는 돌려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랑은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래요. 영발이와 강자 언니는 환   경적으로 너무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   랑이 나누면 무척 커지고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누고   할아버지도 그랬어요. 처음에는 사랑의 나눔을 잘 몰랐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고집만 피웠어요. 하지만 누리를 통하여 그 사   랑의 기쁨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누리   도 이제 그 사랑을 받고 행복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강자 언니와 영   발 오빠와 누고 할아버지와 필우는 희망을 찾았어요. 누리도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금 희망을 간직했어요. 때로는 희망을 위해 사랑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곧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 사랑이   희망의 얼굴로 변하여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에요. ”

누가 그랬던가? 사랑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귀찮은 거라고 말이다. 누리의 삶을 보면서도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감동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 나는 그 감동을 왜 가슴으로 느끼려 하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다. 사랑이 언제부터인가 생각하기조차, 내 기억에 담기조차 귀찮고 느려터진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 나는 모든 것을 머리로 느끼는데 기계를 작동시키려 한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어른이 되면서 복잡한 사유 구조에 뒤얽힌 사랑과 나눔의 희망이란 것이 무척 귀찮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알고 있다. 죽음이 불가항력적인 운명이라면 사랑은, 그리고 희망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나눔의 힘이라고 말이다. 내가 등을 돌리고 서 있어도 그 사람이 내게 찾아 와 나의 등뒤에 날개를 달고 끝내 나를 날아가게 만드는 가벼우면서도 강경한 것이라고 말이다.

누리의 결말은 몇 번을 읽었는데 잘 모르게 나와 있다. 아마도 중요한 부분에서 그냥 눈을 감았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이 한 편의 동화로 인해 다행인 것이라고 치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감은 머리 위에 있는 내 눈이 말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한껏 기대감을 세우고 비전을 제시하라고 한다. 나 역시 그 기대감이 증폭될 것을 희망한다. 설사 우리의 희망이 소수 점 이하의 확률일지라도 책 속에서만큼은 그 사랑의 열매를 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어른들 생각이다. 물론 아이들 역시 어른들의 사랑이 더욱 유연해져서 더 이상 사랑의 나눔이라는 것이 정략적이고 귀찮은 대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그렇게 대치되어 살면서 우리 사회가 조금은 거짓이 아닌 진실한 쪽으로 선회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반 토막 인생을 살다가 간다. 아무리 장족(長足)하는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 역시 물어보면 반 토막의 불완전한 시간을 살아서 아쉽다 말할 것이다. 누리는 우리가 무엇을 누리고 살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 큼을 누리고 얼마 큼을 나누었는가를 대변해주고 있다. 나누었다고 해서, 무척 많이 나누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길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싹도 트이지 못한 어린 친구들의 희망을 누군가 나누어 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다행히도 다같이 공감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은 너무도 약하고 힘없는 자에게 때로는 외면하는 모습으로 차갑게 대하기도 하고, 가끔은 동정 같은 연민으로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기대케 하고픈 연정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누리가 고마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누리의 마음 속에 희망을 꿈꾸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아무도 말릴 수 없는 희망을 향한 상경(上京)이 누리에게 있었고, 엄마를 마음 한 곁에 접어 두면서도 결코 잃지 않았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억이 있었다고 말이다. 그것은 유전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그 전부터 있었던 삶의 질곡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과 함께 숨쉬는 우리가 꿈꾸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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