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669

 

장려한 문화재의 광휘를 덮어 버린 내홍의 역사 - "비잔티움 연대기"을 읽고

부산시 동래구 안락2동 박경옥

 

 

 

이 책을 읽기 전만 해도,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왕도, 역사적인 사건도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었다. 세계사를 배울 때 스치듯이 언급된, 동방정교회와 서양가톨릭이 교리적으로 대립했다는 것과 러시아 정교문화의 원류가 되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만지케르트 전투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십자군은 단순히 교황을 위시한 서방교회와 동방의 이슬람이 대치하는 와중에 비잔티움 제국이 위치상 경유지 역할을 한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비잔티움 연대기>를 읽게 된 것도, 처음 계기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비잔티움의 장려한 건축물만은 내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비록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지만, 중후한 품격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물의 대다수는 건물의 규모나 정교한 장식으로 사람들을 압도하지만 비잔티움의 건축물, 특히 성소피아 성당은 달랐다. 물론 규모도 엄청나고 장식도 많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벼운 찬사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탄을 내뱉게 하는 그 무언가가. 고아하되 화려하지 않고, 중후하되 무겁지 않으며, 성화보다 더 성스러운 기운마저 감돌던 그 건축물을 대면한 순간, 나는 말 그대로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비잔티움의 장려한 건축물과 이미지가 가장 잘 들어맞는 장면을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비잔티움이 멸망하는 부분을 들겠다. 한 나라가 멸망하는 대목을 읽게 되면, 아무래도 기분이 가라앉고 무거워지게 된다. 비단 처절하게 패배하고 승전국에 유린당하는 모습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라가 망할 즈음이면, 지배층이 실정을 거듭하고 이런저런 추태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적이 치졸하고 비겁한 계략을 이용해 패한 것이라면 고고함으로 포장할 수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역량이 부족한 지배층이 나랏일을 엉망으로 처리하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비잔티움이 멸망하는 장면은 그렇지 않았다. 진정, 고결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한 장엄한 최후였다. 황제의 표장을 떼어내고 전투에 참가한 비잔티움 최후의 황제에서부터, 턱없이-부족한 전력으로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운 비잔티움의 사람들. 한 나라나 세력이 전투로 멸망할 때라면 보상을 노리고 배신한 고위직이 나올 법도 하련만, 그런 사람도 없었다. 장렬하게 싸우다 포로로 잡혀 투항권고를 받았지만 끝내 거부하고 처형당하는 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비록 패배해 멸망했지만, 고결하게 스러진 그들의 혼은 비잔티움 부활의 전설로 남아 사람들의 마음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한 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동시에 이 책에서 나의 가슴을 떨리게 한, 몇 안 되는 장면 중 하나이기도 했다.

 

<비잔티움 연대기>자체에 대한 나의 감상은 크게 두 가지였다. 가슴 벅찬 감동을 원하는 사람은 절대 읽지 말아야 할 책이라는 것과 반면교사의 전범으로는 손색없는 책이라는 것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면 나는 이 책이 치국에 대한 실패사례를 결집해 가상 국가의 연대기 형식으로 서술한 픽션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형태의 실정이 거듭되고, 갖가지 형태로 내분이 끊이지 않는다. 비단 지도층 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비잔티움의 역사에서는 ‘민중’이 단순히 지배층에 휘둘리거나 의도적으로 선동 당해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행동해 전면에 나선 대목이 여럿 있다. 그러나 그저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구체적인 청사진은 물론이고,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대중적인 인기는 없을지언정 내실 있는 정책을 추진하던 황제인 마우리키우스를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축출하고, 경험 많은 정치인도 명망 높은 지식인도 아니고 그저 무훈을 날리는 장군인 포카스를 무작정 제위에 앉힌 것을 보았을 때만 해도 황당해하는 정도였다. 포카스는 황제로서의 역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덕마저도 부족한 인물이었고 자연히 비잔티움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공포정치로 치달았다. 이 대목을 읽을 때만 해도, 인기영합주의의 폐해가 나타난 것도 역사가 꽤 깊구나 정도의 생각만 했다. 그러나 바로 얼마 뒤,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자 나는 어이가 없어 말문을 잇지 못했다. 실정을 거듭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인기 없는 정책을 연이어 추진한다고 지도자를 내치겠다는 것부터가 기가 막혔지만, 무턱대고 행동한 결과가 어떤지 이미 겪어 놓고도 또다시 같은 일을 벌이다니.

 

만지케르트 전투 부분에 이르면, 수뇌부의 대처가 어찌나 어이없는지 읽다가 짜증을 냈다. 역사책을 보면서, 서술논조나 해석방법 때문에 짜증이 났던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역사적 사실 자체에 짜증이 났던 건 처음이었다. 국방경계를 강화한답시고 이슬람 세력과 인접해 있던 우방국을 군사 점령해 종교탄압을 시작하는가 하면, 황제를 적대시하던 유력귀족이 전장에서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이탈하는 일도 있었다.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은 패전국인 비잔티움에 아주 관대한 조건으로 포로가 된 비잔티움 황제와 강화를 맺지만, 패전의 책임을 황제에게 모두 떠넘기고 새 황제를 옹립한 비잔티움에서는 일방적으로 강화협정을 파기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선전포고까지 한다. 만지케르트 전투가 비잔티움 쇠퇴의 시작점으로 기록된 데에는, 패배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비잔티움인의 한심하고 어이없는 대처가 훨씬 더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비잔티움 사람들의 교육수준은 높았다. 교육은 극소수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모든 국민까지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각계각층에서 갖가지 분야에 대해 활발하게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저작을 남긴 황제나 황제의 가족도 여럿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저작이 보존되고 전송된 것도 이런 환경 덕택이었다. 교리논쟁이 전국가적인 문제가된 데에도 그 이유가 클 것이다. 비잔티움의 종교 논쟁은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아니라, 교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관련된 문제였다. 때문에 어지간히 공부하지 않으면, 논쟁의 중심사안이 왜 논란이 되었는지, 어떤 부분에서 의견이 엇갈리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아는 것이 없으면 갈등을 빚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똑똑했을지언정, 그것을 조율하지는 못했다. 아니, 학식적인 사안에는 해박하지만,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은 서툴렀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많지만 시야가 좁거나 어정쩡하게 똑똑한 사람이라면, 특히 그 사람이 자신의 생각은 한 치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다고 확신하는 상황이라면 진실성이 있는 일을 수긍시키기가 정말 힘들다. 자신외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험자의 관록에서 우러나오는 직감을 무시하고, 학식과 이론을 내세울 때도 있다. 문제의 성격 자체가 다른데도, 자신이 해박한 논리만을 강조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너무 멀리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학식논쟁에만 해박한 사람이라면, 현실의 문제에는 잘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일반인의 교육수준이 높다고, 정치인의 교육수준이 언제나 높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치국.외교의 역량과 그걸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학식과 비례하는 것이 아닌데, 굳이 연관 지으려 한 것부터가 단추를 잘못 꿴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는 비잔티움인 들의 높은 학식을 그다지 강조하지도 않는다. 직접적으로 언급된 적도 거의 없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아는것이 많은데 어떻게 이토록 어이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을까 같은 뉘앙스를 풍기지는 않는다. 내가 그 점을 계속 의식해서 읽었을 뿐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민정책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똑똑하되 현명하지 못하고 영리하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보다 더 위험하며 그런 풍조가 주류가 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고 말이다.

 

제국 역사의 후반부 들어 끊임없이 벌어지는 내전은 제국을 멸망으로 이끄는 촉매가 되었다. 베네치아가 황제의 대관식 왕관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일화는 이 시기의 제국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었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대관식 왕관을 저당 잡았다는 것부터가 극심한 재정위기를 대변하지만, 마련한 돈의 사용처는 국가운영비도 대외전쟁군자금도 아닌 내전비용이었다. 그렇다고 비잔티움 제국 역사의 후반기에만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도 아니다. 비잔티움 역사를 크게 훑어보면 초기에는 잠시 반짝하지만 그 후로는 아주 잠깐씩 오르막이 있을 뿐 내리막만 계속된다. 교리해석, 당면한 현안에 대한 의견 대립, 단순한 권력투쟁, 갖가지 이유로 국가적인 분쟁이 계속된다. 서방유럽이 십자군을 결성해 비잔티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멸망의 결정타이긴 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비잔티움은 번영을 거듭했을까? 변수가 너무 많은 만큼 섣부른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국 전역에 걸쳐 반목과 내분이 계속되는 한 비잔티움에 찬란한 미래는 없었을 것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사진으로라도 비잔티움의 문화재를 본 사람이 있다면 그 느낌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비단 성 소피아 성당만이 아니라, 몇 남아 있지 않은 유물에서도 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성스러운 기운이 흘러넘친다. 하지만 비잔티움의 역사의 품격은 문화재의 그것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역사에서 품격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분으로 물든 비잔티움의 역사가 문화재의 장려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퇴색시켰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나라가 멸망하는 부분이 감동적이었던 것도 처음이었지만, 한 나라 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통사를 읽으면서 이렇게 기분이 무거워지고 찜찜한 것도 처음이었다. 단순한 우울함이 아니라, 정말 안타까웠다. 만약 내분이 계속되지 않았다면, 적어도 국가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만이라도 일치단결하기라도 했다면, 비잔티움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문화재에 부끄럽지는 않은 역사가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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