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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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 - "단 하루만 더"를 읽고

부산 진구 개금3동 부산진여고 조소영

 

  

 

세상에 모든 어머니는 위대한가? 위대하다. 굳이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말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을 일일이 열거한다면 인류의 삶은 그 기억에 압도되어 질식해 버릴 것이다. <단 하루만 더>의 어머니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몇 번의 자살시도 끝에 만나게 된 어머니. 그러나 젊은 날 찰리는 어머니의 삶이 평생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찰리처럼 '놓치고 지나간 소중한 것’을 일깨워준다.

 

가족은 소중하다. 하지만 사실 가족처럼 가까운 만큼 또 함부로 대하는 대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피곤한 일상 속에서도 아침마다 날 깨우고, 밥을 해주시는 어머니에게 난 항상 고함을 지르기 일쑤이다. 마치 내가 혜택을 받는 것이 어머니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 책의 찰리도 예외가 아니다. 어머니가 대학을 보내주기 위해 일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행동한다. 행여나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그것이 어머니에게 무슨 은혜나 베푸는 듯이 행동하며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어쩌면 현대인의 속성일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사랑조차도 이기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고마움을 모르는 ‘현대인의 이기주의’를 작가는 아마 찰리를 통하여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오늘날 TV를 보든 신문을 보든 넘쳐나는 것이 가족이야기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것과 이혼율 50%의 현실과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또한 모자간의 애틋한 사랑을 다룬 책, 영화 등은 수없이 나오지만 아들이 어머니를 죽인 뉴스 역시 우리는 또한 수없이 접해야 하는 것이다. 

 

곧 추석이다. 우리는 또 가족 간의 다툼으로 번진 비극적인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랑을 외치는 시대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결핍된 시대’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랑 홍수의 시대에 사랑 부재를 경험 해야만 할까. 그것은 가족을 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족에 대한 사랑은 나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이기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랑을 외치는 이 시대의 증거물은 어찌 생각하면 우리들의 사랑의 방식이 ‘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어져야 함을 역절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가족에만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것은 가족 이외에도 친구가 있다. 입시위주의 교육정책으로 인해 우리의 고둥학교는 대학을 가기위한 학원으로 전락해버렸다. 청소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 친구는 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청소년기에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중요한 시기를 고스란히 놓쳐버리는 것이다. 찰리의 고독도 이런 학생들의 고독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한 명의 친구라도 우정을 나눌 진정한 친구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는 찰리에게는 친구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찰리의 불편한 감정, 딸로부터 외면당하는 찰리의 모습, 아내와의 이혼, 이로 인한 주변의 멸시 등 오로지 불행한 가족 이야기뿐이다. 불행한 가족사에 대하여 의논할 친구조차 없었으니 어쩌면 찰리의 고독이야 말로‘완벽한 고독’이었다. 그러니 찰리가 더욱 외로웠던 이유는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꿈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런 소중함이 모두의 소중함이 되기 위해서 는 찰리의 어머니와 같은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소중하다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형용사다.

 

'사랑을 상태로 인식'하고 있다는 근거다. 하지만 소중하다는 말이 형용사에 머무는 것은 곤란하다. 찰리가 이 단어의 의미를 그저 머리로 생각하고, 조금도 희생이 없는 상태로 인식하기 때문에 사랑을 이기주의로 오해했던 것이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희생이 없는 그냥 감정의 어떤 상태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사랑법을 상대에게 강요하고 불협화음이 생기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단어, 혹은 사랑이라는  단어는 '동사'가 되어야 한다. 내가 찰리의 어머니처럼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는 움직임’을 보일 때 진정한 소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찰리가 불행했던 것은 바로 이 말을 형용사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찰리의 불행이기도 하며 현대인 모두의 불행이기도 하다.

 

사랑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단 하루만 더>의 찰리가 내게 주는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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