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674

 

"남한산성"를 읽고

경남 거제시 신현읍 수월리 유성재

 

  

 

새천년을 맞이하는 소란스러움이 월드컵의 열기로 증폭되어 나의 신경은 흩어졌다. 그 열기의 후유증은 오래 갔다. 그런 와중에 백일간의 전국온천답사여행을 하고, 거제도에 있는 새로 얻은 직장에 적응하는 등의 이유로 책을 손에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겨울이 닥쳐 세상사가 고요하게 느껴질 무렵, '김훈답다' '김훈의 시대가 열렸다' 는 조용한 소문이 섬까지밀려 왔다. 칼의 노래를 보았다. 장중하면서도 화려했고 구도가 잘 잡힌 문장 속에 슬픈 음색이 배경같이 깔려 있음을 읽었다. 대학 중퇴후 난중일기를 읽고 충격을 받아 30년 후 완성하였다는 것을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소감에서 알았다.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문학부 신문 기자 생활을 하면서 해박한 문학지식을 쌓았을 것이고, 구상했던 작품의 자료를 준비하며 글쓰기의 삶을 이어 왔을 것이다. 미래를 가슴에 품으며 문학의 끈을 놓지 않았을 터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의 안타깝고 외로웠던 긴 시간이 눈에 집힐 듯하여 그가 좋아졌고 닮고 싶어졌다. 

 

그의 작품을 대하다보면 선사시대 → 조선시대 → 고대시대 → 현대 → 조선시대의 흐름이다.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 온 작품이 남한산성이다. 선택의 이유로써는 첫째, 김훈이어서 둘째, 특별한 것도 없는 성의 어떤 면에서 모티브를 얻었을까 하는 의문 셋째, 연상되는 낱말 육군교도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지 넷째, 알고 있는 역사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들여다보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작가와 화가의 고민이 함께 어우러진 분홍빛 바탕의책표지 그림은 겨울을 견디고 본래 그러하듯이 저절로 돋아나서 춘궁기의 먹거리가 되는 냉이꽃이라고 한다. 작가는 책머리에 약소한 조국의 치욕과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라고 여겨지나 병자호란으로 끝나버린 역사가 아니었기에 희탕을 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사탕과 관용을 얻을 수 있음과 본래대로 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원고지에 연필로 고독하게 글을 쓴 작가의 노고가 활자 이면에 묻어 있는 진중하고 느린 호흡으로 이어지는 육성을 들어 본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1627년 후금이 3만여 명으로 의주를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평산까지 쳐들어오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최명길의 강화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지맹을 약속하는 정묘호란을 겪은 노하우였다. 그 후 9년 동안 호금은 세력을 키워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호아제즉위식도 하였다. 조선 인조비 조상 청국사절단 문제, 조선의 춘신사, 회답사의 예의문제 등으로 배금정책으로 일관하는 조선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조정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1636년 겨울, 청군은 심양을 출발해서 요동을 지나 한양까지 불과 십여일만에 십만이 넘는 대군이 진군해 오지만 말싸움만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싸움이 많았다. 외침이 없으면 우리들끼리 싸우고 죽었다. 급기야 청군을 피해간 남한산성에서도 싸움이 있었다. 적들은 말에 의한 눈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왔고, 안에서는 어떤 선택도 쉽지 않은 처지에서 화나고 울음섞인 목소리로 46일간 언쟁을 벌이는 이야기다.

 

광해군을 몰애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힘이 없었다. 영의정 김류는 의지없이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는 인물로 비쳐지고, 최명길은 주변정세의 이해와 국가를 위한 실리주의자였다. 김상현은 유교적 명분을 앞세우는 고지식함을 보였다. 병판 이성구는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 보이지 않았다. 수어사 이시백만큼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묘당은 이런 모습이었지만 대장장이 서날쇠는 무기를 손질하고 행궁에 필요한 조치를 했다. 

 

글은 멀지만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으로 의식있는 민초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싸움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 속에서 버리는 힘을 소진시키고 소진의 과정 속에서 항전의 흔적을 지워가며 출성의 날을 맞아야 할 것으로 김류가 생각한 것처럼, 상황은 그러게 되어 갔다. 추운 날씨에 동상에 걸리고, 토끼사냥 전투로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명분에 의한 전투는 출병군을 전멸시켰다. 짐승은 굶어죽고 또, 잡아먹혀 씨가 말라 버렸다. 집들은 뜯기워 허물어졌다. 이렇게 성은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말라갔지만 오히려 더욱 풍성해지는 것은 말과 소문의 소용돌이였다. 결국 강화도가 함락되고, 임금은 성을 나가 무릎을 꿇고 군신지맹의 조칙을 받았다. 백성들은 날마다 몇 명씩 성안으로 돌아왔고, 봄농사가 늦지는 않았음을 말했다. 초경을 한 나래를 며느리로 삼을 생각으로 웃음짓는 서날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두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 삶은 일상처럼 계속되었다.

 

김훈은 남한산성을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꼽으며 자주 자전거를 타고 논다고 하였다. 이 성은 온조왕 성터라는 학설이 있으며,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이용하여 1624년에 축성했다. 이시백이 유사시에 대한 기동훈련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 12,700명을 동원하여 실시했으나,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화의하고 말았다.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못했다. 인조는 산성의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와서 서문으로 나와서 항복했다. 서문은 1779년 정조대왕이 성곽을 개축하면서 화친으로 이르는 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치욕을 되세기며 교훈을 삼고자 함이었으리라. 현재 경치 좋은 곳으로 찾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며, 음식점과 술집도 즐비하리라. 역사의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장치는 없는 것인가? 어쩌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은 역시나 윤회 탓일까!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는 일러두기는 자꾸만 현실과 비교하게끔 강하게 다가온다. 청의 침탈은 곧 권력과 자본의 침탈로 여겨진다. 이로 인해 국난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빈곤으로 몰고 가지 않았던가. 밴댕이것 나누는 것도 임금의 윤리를 얻는 비생산적인 회의, 사공의 죽음, 가제로 이주되고 허물어지는 민가....

 

시를 읽으면 처음 대하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았고, 산문은 식혜, 과일, 떡국 등의 달작지근한 맛을 소설은 라면과 김치, 찌개, 탕이나 전골 등의 얼큰함을 맛보는 느낌이 들었다. 김훈의 소설은 수육 먹는 기분이 난다. 한 줄, 한 문장마다 그림이 영화장면처럼 떠올랐다. 생애를 아껴 두 어 편 더 쓸려고 한다는 그의 말이 조금 섭섭하지만 다음 작품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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