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8671

 

다시 찾은 상실의 시대 -  "상실의 시대"를 읽고

부산 동래구 사직3동 전정욱

 

  

 

나는 지하철 서면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오자 문득 '죽음'  이라는 단어가 떠올라 큰 혼란에 휩싸였다. 의무소방으로 군 복무를 하며 구급활동을 하고 있을 때 일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서면 지하철 선로에는 피를 흘린 채 이미 멎어버린 젊은 여자가 있었다. 

 

눈도 감지 못하고 죽어버린 여자를 겁에 질린 사람들 시선 사이를 피해 지하철 역 밖으로 옮겼다. 여자는 왜 자살을 택했을까? 연정의 배신이었나? 갚지도 못할 빚 독촉이었나? 수많은 추측만 가능할 뿐 그때나는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제대 했고 소방의 옷도 벗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나와 아무상관 없는 그녀의 일이 떠올라 갑자기 왜 죽음이란 평소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실체를 만나야 했을까? 나는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흘러서 아니면 갑작스런 사고로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다면, 그리고 나의 죽음도, 나는 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죽음이란 실체를 말로써 표현하여 이해해서 내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빗나가거나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써 존재하고 있다.' 그때, 잊고 있었던 '상실의 시대' 한 구절을 절로 되뇌었다. 그리고 지하철 문이 열리자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죽음마저 삼켜버린 삶의 복잡한 플랫폼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상실의 시대' 를 찾았다. 이미 시월임에도 구름이 개인 높은 하늘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온 세계의 가랑비가 온 세계의 잔디밭에 내리는 것 같은 침묵이 가득한 때 나는 다시 '상실의 시대' 를 읽었다. 

 

처음 '상실의 시대' 를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이미 내 주위에는 이 소설을 읽고는 나에게 권해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기가막힌 사랑이야기야. 야한 장면도 많아.' 등의 평은 나를 솔깃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죄와 벌' 이나 '데미안' 같은 고전만을 읽어야 한다는 도덕주의에 빠져 있던 나는 상실의 시대'를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로 단정 지었다. 

 

그런데 열아홉에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스무살을 지루한 재수공부로 보내는 동안 나는 더욱더 나 자신만의 비좁은 의식 안에서 움츠리며 지냈다. 그리고 스물 한 살, 아니 만 스무 살. 다시 찾은 스무 살에 시작된 대학생활은 전혀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낯선 공간에서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과의 만남은 자의식을 위협하는 두려움이었고 흥청이던 술자리가 끝나면 되돌아오는 좁은 하숙방은 공허함만을 키우는 장소였다.

 

그러던 중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그녀는 혼자만의 생활에 익숙한 나에게 같이하는 시간들의 기쁨을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언제나 하루키에 열심이었고 항상 나에게 하루키를 말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와 헤어질때까지 한 번도 하루키를 읽지 않았다. 그녀와의 이별은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떨어져 앉아 강의를 듣는 예전의 나로 되돌리었다. 룸메이트도 애인과 외출해버린 크리스마스, 나는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것 보다 '상실의 시대' 를 읽는 쪽을 택했다.

 

소설속의 인물들은 너무나 우리와 닮아있었다. 캠퍼스 내 전체궐기를 부르짖는 운동권에 시무룩하고 연인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그리고 무엇이든 계획하지만 아무것도 되는 것 없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던 우리.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어쩌면 캠퍼스 곳곳에 어색하게 베어 버린 알코올 냄새처럼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나이라 나는 생각해 버렸다. 그러면서도 소설의 마지막,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 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짖고 있는 와타나베처럼 나 역시 여자 친구와 나, 우리가 우리였던 그때를 그리워하며 책읽기를 마쳤다.

 

그리고 3년이란 세월이 흘러 나는 다시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그 동안 나는 조금 변해 있었다. 또 다른 여인과 만남을 가졌고 헤어졌으며 군 생활을 통해서 나 자신과 타협을 시도하며 세상과의 어색함을 줄여나갔다. 이렇게 달라진 나에게 이번 일독은 원제 '노르웨이의 숲'이 우리나라에 출간되면서 왜 '상실의 시대'로 바뀌었는지를 느끼게끔 해 주었다. 끝없이 하늘로 높이 빽빽이 솟은 침엽수림에서 서로를 의지하지 못하고 홀로 선 나무의 외로운 심정은 이미 내 나이 스무 살에 여실히 느끼었다. 그런데 '상실의 시대'란 제목은 서른 일곱이 되어 버린 와타나베가 기내 방송에 준비없이 옛 기억을 불쑥 되찾은 것처럼 우리도 너무나 간절했던 것을 세월이라는 힘에 잃어 버리고는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 기억에 너무나 당황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것을 말해준다.

 

내가 '서면역 여자의 죽음'에서 느꼈던 것처럼, 두고두고 몇 번씩 깊게 생각했던 일일수록 시간이 흐르면 시간관념이 변해 잊힘이 깊어지지만 다시 또 생각날 때 그 어색함과 상실감은 더 했던 것이다.

 

와타나베의 친구 가즈키도 죽고, 그 둘의 여인 나오코도 죽고, 젊은 여자도 지하철에서 죽었다. 그들도 물론 틀림없이 괴로웠겠지만 그동안 나 역시 괴로웠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 나는 왜 살아있는 것일까? 그들보다 쉽게 기억들을 상실해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서랍 속 상자에 넣어두었던 옛 사랑의 편지를 꺼내보았다. 그녀들과 헤어지고 서로 주고 받았던 편지를 태워 버릴 까도 했지만, "태워 버려도 마음에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아요."라고 했던 와타나베의 말이 떠올라 그동안 보관해 오던 것이었다. 그 편지들이 오고 가는 동안 대통령이 처음으로 탄핵되었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수만의 사람들이 전쟁에 죽었고, 농민들은 농사지은 쌀을 불태우고 스스로 자신의 배를 갈랐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고 나는 주말이면 여자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으며 혼자 있는 날에는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음악을 들으며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 나는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한 동안 이런 내 자신을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나는 왜 눈에 보이는 세상의 불합리에 맞서지 못하고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안달하는가? 작가가 <한국어판에 부치는 서문>중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건, 자아의 무게를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나는 한 여인을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이 결코 사회의 무게를 빗겨나는 비겁한 일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오히려 젊은 시절, 깊은 사랑의 이해를 통해 더 거대한 사랑을 예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도 시간에 묻혀 상실되어 갈, 수십 년 후에라도 라디오에서 그녀와 듣던 유행가가 흘러나오거나 비 개인 아파트 베란다에서 같이 보았던 무지개라도 본다면 그 시간동안 나를 말없이 지탱해 왔던 겹겹이 쌓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를 통해 내가 그 감정들로 당황스러워하거나 힘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나를 지금까지 싸움에서 살아남게 해주었고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에 깊이 감사해야 함을 배웠다.

 

이런 확신이 있기에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인 이 세상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확신도 없지만 희망을 가지고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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