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5952

 

 

엄마의 행복을 부탁해!- <즐거운 나의 집>을 읽고

                                                                                        부산진구 부전동 서영주

 

 

찬바람이 불고 조금씩 내년을 준비해야 하는 이 계절에 중학교 3학년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원서를 쓴다. 1년 전 난 뱃속에 8개월 된 태아를 품고서 아주 바쁘고 힘들게 중학교 3학년 담임을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은 각 가정에서도 중요한 문제여서 부모님들의 동의와 확인을 받은 후에야 원서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유독 우리 반의 한 아이가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기를 원했고, 아버지는 어중간한 성적으로 인문계에서 힘들게 공부하지 말고 공고에 진학해 기술을 배우기를 바라던 터라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몰라 힘들어 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부모와 상의가 되어 원서 작업에 차질이 없도록 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끝까지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들려주는 이 아이가 만삭의 몸으로 담임을 하고 있던 나에겐 사실 조금 짜증이 났다. 신경을 써서 상담도 해주고 따로 자료도 만들어 주며 생각해 보기를 권유했지만, 내가 준 자료들은 공중으로 날아갔는지 부모들은 각자 다른 말만 반복해 결국 아버지를 학교로 오시게 했다. 학생의 이야기만 듣다 아버지를 만난 난 그 학생의 부모가 이혼한 상태이고, 어머니랑 같이 사는데 아버지가 권유하는 학교를 진학하려니 눈치가 보인다는 학생의 처지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가정환경조사서에 부모의 이혼에 대한 언급이 없던 터라 난 솔직히 놀랬고, 그 동안 아이에게 학교를 정해오라고 닦달했던 내가 부끄럽고 아이에겐 미안해졌다. 

 

위녕의 담임교사가 청소시간에 위녕을 불러 선입견 가득한 눈초리로 이혼한 가정에 대한 염려를 했던 그 모습처럼, 난 이혼한 부모를 둔 아이의 마음에 또 다른 형태로 상처를 남긴 셈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언제나 교사인 나는 공명정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혼한 부모를 둔 아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에게나 똑같이 대우한다고 한 것이 어쩌면 그들을 더 불편하게 한 적은 없나 돌이켜 보게 되었다. 말 한마디 위로를 주기 위해 한 것이 오히려 위녕의 반발심을 자극했던 것처럼, 나 또한 엄마랑만 사는 것은 어떠냐고,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본 것이 아이에게는 오히려 이제야 적응한 새로운 환경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어서 남들의 걱정과 관심을 받아야 함을 깨닫게 한 셈이니, 실수를 한 것이었음을 위녕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또한, 지난주 학교에서는 중간고사가 있어서 학생들은 기역, 니은 순서로 된 번호순으로 앉게 되어있었는데 김 씨인 아이가 이십 번 대의 번호에 앉아있자 얼른 너의 번호로 돌아가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 아이는 이혼한 엄마와 사는데 호주제 폐지로 성을 바꾼 것이어서 가뜩이나 예민한 시험기간에 그 아이는 또 나로 인해 가슴에 상처 자국이 하나 생겼을 생각을 하니 또한 너무 미안해졌다. 그러나 이 미안함의 발로는 이혼가정의 아이는 상처 받을 일도 많고, 상처 받기도 쉽다고 여겨온 또 하나의 오래된 고정관념이었다. 

 

나는 감사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금슬 좋은 부모 밑에서 화목하게 자라왔기에, 이혼한 가정은 깨어진 유리의 파편처럼 어딘가가 부서져 있는 느낌은 아닐까 늘 생각해왔다. 그러나 「즐거운 나의 집」을 읽으면서 나의 고정관념은 아주 깡그리 부셔졌다. 

 

이혼한 부모를 둔 위녕은 ‘부모가 이혼해서 불행한 아이들도 많지만 부모가 이혼하지 않아서 불행한 아이들도 많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혼한 가정을 결손가정이라 하고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라면 아이가 양부모의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다는 등, 이혼에 관해서라면 일단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에 위녕의 이 말은 관점을 전환시키는 계기를 제공한다. 교사로서 가정환경 조사서를 보며 부모가 있고 형제들이 있는 아이들은 그 종이만 보고서 어느 정도 다들 안정되고 행복하겠구나 하고 가정했던 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근거 없는 피상적인 추측이었던 것이다. 올해 초 태어난 나의 딸 역시 학교에 가게 되면 이런 가정환경 조사서를 작성할 테고, 그 조사서만 보고서는 절대 우리 가정의 속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내가 가정을 이루어 보니까 알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오랜 연애 기간 끝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순조롭게 아기도 생겨 우리에겐 새로운 출발과 함께 장밋빛 미래만이 존재할 것이라고 그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게 인생이었다. 어렸을 때 나 역시 학창시절 내 짝의 부모가 이혼했다고 하면 이제 그 아이의 인생은 끝이 난 것처럼 그 친구를 가엾게 여겼고, 위녕이 ‘어른이 되면 사랑하고도 아이를 낳고도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거냐’고 따져 묻듯, 그 아이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리라 상상했다. 

 

그러나 곰탱의 옥바라지를 마다 않던 꽁지도 그 추억을 태워버리며 이혼했고, 나 역시 생각과는 다른 결혼생활의 실망감과 치밀어 오르는 스트레스로 헤어진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은 내 부모가 그것과 별개로 살았던 것처럼 이혼이라는 단어는 입에도 올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혼이라는 것도 사전에만 있는 단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장보고 밥 먹고 잠자고 하는 듯 우리의 생활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같이 생활하는 그 사람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타협할 수 없게 된다면 충분히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되자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어떻게 커 가는지를 쓴 이 소설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위녕이 아빠의 결혼식에 연주한 축가의 제목이기는 하지만, 비단 그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나는, 만약 결혼 생활을 끝내야만 한다면, 나의 이야기를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쓸 수 있을까 생각하자 위녕 엄마가 해내고 있는 생활이 비로소 쉽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무려 세 번이나 이혼을 했고, 각 결혼마다 한명의 아이를 가져 성이 다른 세 아이의 엄마이고, 사람들의 숱한 비난으로 대한민국 대표 이혼녀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된다. 그렇지만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 그녀를 행복하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그녀의 아이들은 적어도 자신의 엄마가 인생을 자포자기하는 불쌍한 이혼녀가 아닌,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엄마임을 알게 된다. 결혼을 하고, 불행한 일상을 견뎌내며 자기 인생의 자동차 열쇠를 강물로 던져버리는 엄마가 아니라, 자기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운전해 나가는 주도적인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위녕은 결혼한 여자의 얼굴에는 없는 빛을 이혼을 한 자신의 엄마에게서는 발견하고, 자신을 지키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엄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게 된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딸아이에게 춤을 추자고 말하는 그녀는 주책없는 게 아니라, 스스로 행복해 하는 열기를 딸아이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위녕은 그 모습만으로도 행복감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위녕 엄마가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런 열기를 딸에게 전할 수 있었을까? 

 

세상사람 모두가 그녀를 앞뒤 없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와 배려 없이 단지‘이혼을 세 번한 여자’로만 평가하려 들지만, 사실 그녀는 스스로 행복해지고자, 자기 인생의 주인이고자 인생의 갈림길에서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며 그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한사람만 사랑하고 아끼며 어려움도 이겨나가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그 결혼 생활이 예기치 못한 요인들로 자기 인생을 파괴하게 된다면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자기를 버리고 그 틀에 안주해야 하는가를 이 책을 통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 역시 뱃속 아기의 심장소리에 설레어 하고, 자장가를 부르고 동화책을 읽어가며 아기를 재우고 남는 시간에 생계를 위해 글을 쓰며 힘들게 육아도 해낸 평범한 엄마여서 마치 나의 옆집의 아줌마 같은데, 우리 모두는 그녀의 평범한 모습은 모두 뒤로 하고 그녀가 선택한 이혼에만 초점을 기울였다. 그러나 과연 그녀가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아끼며 행복을 추구하는 여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았을까.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 사이, 그녀는 스스로 죽을힘을 다해 그 힘든 강물을 건너왔고 그 상처로 더 이상 사랑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아니라,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면 주저 없이 설렘 가득한 사랑을 또다시 찾는다. 서저마처럼 불행해질까봐, 망칠까봐 두려워서 시작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상처를 입을 수 있더라도 그녀는 자신에게 솔직하고,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엄마이다. 

 

막딸아줌마처럼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구박받고,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매를 맞으며 불행하게 사는 인생을 보며 그녀의 아이들은 엄마라는 사람은 행복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런 불행을 감수하며 결혼생활을 끝내 유지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그렇게까지 불행하게는 살지 않더라도, 매일 자신은 남은 반찬에 밥을 비벼 먹으면서도 남편의 밥상을 정갈하게 차리고, 자기는 십년 전에 산 블라우스를 계속 입으면서도 매일 아이의 교복을 다리고 백화점에서 아이의 옷을 사며, 자신의 꿈과 행복은 다 잊고 사는 엄마를 과연 우리 아이들은 행복한 엄마라고 볼까. 

 

얼마 전 TV 드라마에도 이렇게 자신의 꿈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결혼 생활은 유지한 채 주부 안식년을 가진 소재가 방영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이기적이고 가족에 등을 돌리는 엄마로 폄하하는 의견이 팽배했지만, 많은 주부들이 호응을 하고 동조하자 엄마라는 인생이 무엇인지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쁜 직장 상사를 두었다는 셈치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쪼유의 엄마도 그 드라마를 열심히, 열렬히 환호하며 봤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들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 즐겁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위녕이 엄마를 행복을 찾는 뜨거운 사람으로 보듯이, 나의 딸이 커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봐줄지 의문이다. 하루하루 밥벌이와 육아에 힘이 들어 곯아떨어지기 바쁘고 점점 나를 잊고 가족을 우선시하며 힘들게 마련한 가족의 틀을 깨지 않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어머니들의 인생을 답습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엄마가 되더라도, 누군가의 아내가 되더라도, 내 인생의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어야 내가 행복해 진다. 그리고 내가 행복해야 나의 딸이, 우리 가족이 즐거워진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위녕의 엄마가 힘든 이혼의 과정을 거치며 깨닫게 되었고,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불행한 건 대개 엄마가 불행해 하기 때문이라는 걸 위녕이 느꼈듯이 엄마의 행복과 즐거움이 우리 아이들을, 우리의 집을 ‘즐거운 우리 집’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난 나의 행복을 위해 나와 이야기하는 시간을 늘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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