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5060

그 깊은 언어의 심연속으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경남 진해시 태평동 조은정

 

 

뜻이 다 드러나서 말이 그친 것은 천하에 지극한 말이다. 하지만 말은 그쳤으나 아직 뜻이 다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더욱 지극한 말이다.   -신흠, <야언> 

 

아무리 머리를 갸웃거려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책을 덮었으나 책은 저 홀로 펼쳐져 있었다. 이야기는 끝났으나,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꿀단지의 달콤함을 맛본 아이처럼 나는 그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착착 감겨드는 문체, 그리고 우스꽝스럽고 천진스러운 인물들이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몰아치듯 하룻밤에 읽어버리고 나서 마치 뭔가에 속은 느낌이 들었다. 단순하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가벼운 소설책이라고 얕잡아본 탓일지도 몰랐다. 마치 범인을 쫓는 수사관처럼, 나는 되짚어보며 어떤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迷宮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작가가 책 속에 뭔가 중요한 것을 숨겨두었는데,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기 위해 나는 길을 되짚어가야만 했다. 우선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제목부터가 비상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심오한 철학을 비꼬는 제목이 우습지 않은가? 하지만 결말로 치닿을수록 비웃음은 숙연함으로 바뀌고 만다. 일자무식인 황만근의 심오한 철학의 높은 경지가 凡人은 따라갈 수 없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의 인물들은 기막힐 만큼 살아 움직인다. 살아 꿈틀대는 에너지는 신화의 주인공에 버금간다. 겉모양은 과장되고 허황된 것일지 모르나, 그 안의 진짜 알맹이를 찾아내어야 이 책을 읽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알맹이를 찾고 싶었다. 다시 책을 집어들며,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흘려버리고, 웃어버리고, 날려버린 것에 무언가 있을 터였다.

성석제의 소설집<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데, 뜬금 없이 청국장 생각이 간절했다. 고약한 냄새가 슬금슬금 집안 가득 배어들면 ‘뭐 저런 고약한 냄새가 다 있지’ 뜨악해 한다. 하지만 일단 그 맛을 보면, 그만 청국장의 마력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 뜨악한 청국장 냄새 같은 황만근을 보며 처음엔 웃고 말았다. 바보로 불리우며 마을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던 황만근이 사라지고 마을사람들은 허둥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깟 ‘바보 자석’하나 없어졌는데, 마을 이곳저곳은 엉망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처음엔 인정할 수 없었다. 잘 씻지 않고, 남의 일을 잘 도와주어서 아들에게마저 구박을 박는 그 사람의 존재는 마을 사람 마음의 전부였다.

 

그런 그가 한줌의 뼈로 돌아오는 사실은 가슴아팠다. 그의 不在를 깨닫고 애닮아 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하늘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신선이 되어 바람결에 묻어가 버린 것처럼, 아니면 부처가 된 오세암처럼 그는 사람들 마음에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황만근의 무게 감은 바로 마을의 진일을 맡아하던 그 마음씨에 있었다. 정작 바보가 누구였는지, 그가 떠나고 나서야 세상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천애윤락>에서 동환 이라는 인물 역시 이채롭다. 초등학교 시절의 인연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동환과의 이상한 얽힘에 주인공은 짜증스럽다. 바보스러울 만큼 착해서, 세상에서 많은 좌절을 맛보는 동환을 보면서 주인공은 복잡하다. 그를 대하는 주인공의 감정은 분노, 착잡함, 쓸쓸함, 고약함, 불쾌감, 열패감... .... 그것은 전면적으로 해당하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의 속성을 갖고 있다는 고백이다. 친구인 주인공을 대하는 동환의 모습에 답답해서 ‘너 사람이냐, 천사냐, 짐승이냐’라는 묻는다. 아마도 동환의 성격은 사람이기도, 천사이기도, 잔인한 짐승의 모습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를 대하는 주인공의 심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황당한 동환의 결혼식에서 어이없는 싸움으로 주인공의 심경은 극에 달한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는 말로 동환은 답을 한다. 동환은 자신의 희극성을 통해 움츠려있던 사람들의 욕망을 분출하기를 바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명확성을 원하지만, 삶은 그렇게 분명한 경계가 나눠져 있는 것이 아니다. 동환은 그 경계의 불분명성에서 헤 메이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책>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당숙의 책들을 주인공의 집으로 옮기는 하루동안의 이야기이다. 비정상적으로 책에 몰입하는 당숙의 모습과 이삿짐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인공의 모습은 상반된다. 그러면서 혼돈 속에 빠져드는 것이다. 대체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된다. 그러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책은 얇고 네모진 심연으로 다가온다는 결말 역시 그런 혼돈을 부풀릴 뿐이다. 

 

<쾌활냇가의 명랑한 곗날>의 무대는 결코 맑고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쾌할 냇가이다. 그것도 햇볕이 쨍쨍한 복날에 계원들이 모여드는 데, 그 인물들이 가관이다. 증경회장서부터 바보라는 소리를 듣는 위인인 계철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계원이다. 계원들의 묘사도 재미를 더해주지만, 곗날의 정경은 눈앞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로 사실적이다. 징글맞고, 권태롭고, 꾀죄죄하기 그지없는 삶의 녹아있는 그런 곗날의 모습인 것이다. 권태로운 곗날은 어이없는 싸움으로 끝이 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며 쾌활냇가는 텅 비어진다. 비어진 자리에 남은 건 매미소리뿐... ... 그 것은 아마도 작가가 그려내는 희화화된 현실일 것이다.

온갖 종류의 도박에 관한 소설 <꽃의 피, 피의 꽃>은 어떠한가? 

고스톱에서 가위바위보게임까지 도박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이 도박을 하면서 만난 사람과 일화들을 조목조목 적어놓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정말 이런 식으로 도박을 하면 될까? 라는 착각마저 일게 만들만큼 앙큼스럽게 독자를 현혹시키는 마력을 지니었다고 할 수 있다. 성석제의 소설에는 두 종류의 인물이 교차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과 황만근, 동환, 남가이, 書淫까지 빠져본 당숙 같은 황당하고 어눌한 인물이다. 

 

그리고 남자들이 있고, 여자들이 있다. 남자들에게 이야기의 무게가 실리지만, 여자들은 남자들의 무게 감에 힘을 실어주는 존재이다. 여자들의 무게 감을 잘 드러내는 <천하제일 남가이>와 <욕탕의 여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천하제일 남가이>는 이상스런 마력을 지닌 미남이기에 수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목숨마저 걸 정도로 사랑한다. 하지만 그런 미남도 결국 인분이 있는 웅덩이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천하제일의 미남은 천하에 짝이 없이 사람답다는 결론을 내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마지막으로, <욕탕의 여인들>의 여자들은 부잣집 딸이거나, 도도한 비서이지만 주인공에게만은 관대한 인물들이다. 그들과의 연애 담을 통해 삶의 허무함을 토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성석제의 소설을 읽고 나니, 과연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잣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정해놓은 틀 안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 그것만이 옳은 삶인가?

 

아! 대체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전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무수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가벼움 속에 깊음, 빈정거리고 얕보았던 마음을 비웃는 채찍 같은 언어가 나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 그것도 어떤 언어보다도 삼엄하고도 무거운 언어로써 말이다. 

 

어쩌면 성석제는 이런 삶의 진실을 찾아내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 깊은 언어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면서 나는 희뿌윰한 안개를 헤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 진실의 알맹이는 안개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나를 괴롭혔다. 드디어 책을 덮었다. 가슴에 젖어드는 물음표에 오랜만에 나는 밤을 세웠다. 하얀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들고, 일상은 권태의 먼지를 안고 나에게 다시 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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