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6575

부모의 말을 잘 듣는 탕의 체취

"나무"를 읽고

 

 

거창하고 꼿꼿한 장래희망 하나 없었던 내게도 대학을 마칠 즈음엔 생활의 흔적들이 엉겨 붙어 꿈이란게 생겼더랬다. 꿈은 원래 이미지에서 비롯되고 이미지로 귀착한다. 책이 천장까지 닿은 서재, 그게 내 꿈의 이미지였다. 이른바 부산 최고의 대학과 커트라인 높은 과를 나오고도 거의 막일에 준하는 서점일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그 꿈의 여파때문이었으리라. 당시 나는 쥐꼬리만한 봉급의 4분의 1을 고스란히 책을 사는 데 투자했다. 옷가게에선 1시간 이상 고르다가 직원에게 타박을 듣기 일쑤였어도 책을 사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옷 한 벌 값이면 책이 몇권이야? 하는 것이 그때의 내 계산방식이었다.

 

그랬던 것이 그로부터 7여년이 지난 지금은 되려 책 사는 것을 아낀다. 그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책을 내기 위해 낸 책인지, 잘된 번역인지 등을 재어보다가 옷 가게를 나설 때처럼 결과물 없이 책방을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이는 내 꿈을 치워 버려서라기보다 책을 제대로 존중하자는 뜻에서 익힌 버릇이다. 다른 또 하나의 버릇이 있다. 바로 베스트셀러는 사지 않는 것. 무슨 결심이나 뜻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다만 신문지상에 나오는 소개문구들의 상투성에 미리 입맛이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책을 보지 않는 것은 베스트셀러 비디오를 보지 않거나 유행하는 옷을 사지 않는 심사와 맞물려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제법 오래되었다. 나는 <개미>가 나왔을 때 책방에서 그 책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산에서 다친 너구리를 주워다 3주간 동거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야생동물에 관심이 많은 나는 그 책이 그려낼 세계가 무척이나 궁금했었지만 좀 더 인기가 식은 다음을 기약했다. 베르베르의 <나무>도 현재 인기몰이 중이라는 이유로 다음을 기약했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여지껏 읽지 못한 <개미>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고 또 책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어 주저않고 집어들었다. 하드커버로 일관하는 요즘 출판사들의 뻔한 상술과는 달리 소프트 커버에다, 깔깔한 속지 대신 수수한 종이를 쓴 그 소박한 폼새에 결정적으로 마음이 동했다. 책은 환경친화적이기도 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독자의 손과 친화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무>는 오랜만에 참으로 유쾌하게 읽힌 소설집이다. 먼저 번역투가 느껴지지 않는 노련한 번역이 마음에 든다. ‘재우치다’ ‘녹작지근하게’ ‘톱아 보다’등 한글을 구사할 줄 아는 번역자의 감각에 뿌듯해 하며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다. 또한 여기의 단편들은 시사적인 에세이와 소설이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저자 베르베르도 서문에서 쓰고 있듯이, 이 모두가 장편소설들의 생성과정이며, “저마다 하나의 가정을 극단까지 몰고 갔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한 작가의 작업방식을 읽어 내는 일은 오히려 작품의 내용보다 훨씬 재미있는 경험이 되곤 한다. 나는 좋은 글이란, 그것이 소설이든, 시든, 에세이든, 의미를 전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글을 쓰고픈 마음이 일게 하는 글이라고 여긴다. <나무>의 글들은 그런 맥락에서 좋은 글이다. 별 생각없이 품었던 어릴 적의 공상, 나도 한번 소설을 써 볼까, 하는 이미 무디어진 그 공상이 다시 꿈틀거렸다. 나도 이런 달짝지근하면서도 짭짤하게 조언해 주는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독서 내내 뭉글거리는 경험을 했다.

 

베르베르의 시선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현대문명세계 혹은 인간세계를 지긋이 비껴본다. 특이한 것은 그러한 시선이 원심력에 달려 내닫는 돌팔매질이 아니라 구심력에 의해 안으로 말려들어가는 이중적이고 다층적인 비판이라는 점이다. 비판이든 칭송이든 직선적인 것은 매력이 없다. 그런 것으로는 ‘현실의 골과 마루’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소설이 이 현실의 골과 마루를 표현하는데 무엇보다 충실해야 할 장르라면 베르베르는 충실한 소설가인 셈이다. 세상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충동을 자제하여 다시 끌어 앉는 이 이중적 동선은 몇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내겐 너무 좋은 세상>에서 뤽은 ‘너무나 인간화된’ 생활용품들에 지긋지긋해 하면서 수동적이고 기계다웠던 옛날의 기계들을 그리워하는 지극히 ‘인간적인’사람이다. 편리함에서 더 나아가 배려할 줄 아는 정감까지 프로그램되어 있으며, 더욱이 “우리는 프로그래밍된 대로 움직일 뿐이에요. 한낱 기계들일 뿐이죠”라고 우울한 자의식마저 가지고 있는 기계들. 그 자의식마저 인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던 뤽. 자칫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그쳤을 이 작품은 뤽이, 지금은 좀 상투화된 극화이긴 하지만, 자신도 인공심장을 지닌 기계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반전된다. 

 

여기서 문명비판과 문명긍정 사이의 경계선을 걷는 베르베르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경계선 걷기는 권태롭지 않다. 이 책의 많은 작품들은 타락한 정신 혹은 세상과 부단히 싸우거나 싸움을 거는 실험들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실컷 싸우게 해 놓고도 작가가 투사들의 손을 번쩍 들어주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지식을 제한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는 데 대한 기발한 저항담인 <수의 신비>에서 투사 트루아앵은 암살되고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한 싸움에서는 천장을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바닥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유언을 남긴다. 육체의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정신적 사유를 위해 영양액 속의 뇌로 남기를 선택했던 루블레 박사가 결국 개먹이가 되는 <완전한 은둔>도 ‘천장과 바닥’이 동시에 필요함을 역설한다. 베르베르는 투사들의 실패라는 설정을 통해, 독자들이 ‘천장’을 그리워하던 투사들에게 박수를 보내다가도 결국 ‘바닥’에 관심을 돌리게 만든다.

 

이 ‘천장과 바닥’이야말로 뤽이 고민했던 인간성의 조건이 아닐까 싶다. ‘완전한 인간성’ 따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노인과 유색인종을 배척하며, “누가 폭력을 당하는 광경은 견뎌내지만, 어떤 사람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은 참지 못”하는 지 랄 같은 사회일지라도 (<투명피부>), 인간적으로 살아갈 해답은 그 ‘안’에 있음이지 ‘밖’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베르나르의 일관된 메시지이다. 그래서 그는 ‘부모의 말 잘 듣는 탕아’의 면모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베르베르는 탕아적 소설가이긴 하되 부모의 집을 뛰쳐나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소설도 완전히 바깥으로 내닫지 않는다.

 

그럼 그의 탕아적 기질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나는 탐정처럼 궁리타가 한 단서를 찾아 내었다. 바로 구석진 곳을 훑는 그의 후각이다. 대도시에 떨어진 냄새나는 물건을 다룬 <냄새>나 17세기 파리를 간 21세기 프랑스인의 <바캉스>에피스드에서처럼 그의 소설곳곳에 ‘냄새’에 대한 감각이 두드러진다. 냄새란 사람들의 감각을 가장 먼저 자극하면서도 또한 쉬 무디어지게 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러기에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거꾸로 말해, 냄새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가지는 사람은 주변의 틈새와 어긋남에 대한 순간적인 관찰을 오래 되새길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베르베르의 소설들이 그의 말처럼 ‘극단’으로 밀어부쳤으면서도 그것이 직선적인 극단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후각의 발달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를 보는 시선이 아니라 후각이 무디어진 이들에게, 그리고 사회를 헤쳐갈 싸움의 기력이 쇠한 지인들에게, 베스트셀러라는 안개를 무릅쓰고 이 책에 접근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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