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식물성의 저항 - <채식주의자>를 읽고 -
정유진
나는 한강의 소설 속 주인공 영혜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채식주의자인 한 여성을 알고 있다. 자신의 몸에 그려진 꽃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기를 바랐던 영혜와 같이 마치 운명인 듯 꽃부리 영자를 이름의 마지막 자로 가진 그녀는 다름 아닌 내 어머니이다. 그러나 본인을 ‘채식주의자’라고 선언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것이 본인의 특이한 식성일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채식을 권하지 않았고, 오히려 본인은 즐기지 않는 식재료인 육류를 만지고 조리하는 일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가 특별히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최근까지도 그녀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길고 지루한 희생을 감내해왔는지 깨닫지 못했다. 몇 해 전 예순을 넘긴 어머니는 나이가 들도록 변하지 않는 매끼니 고민을 장성한 딸에게 푸념하다가, 지난 날 때때로 고기를 삶거나 굽는 냄새가 부엌을 넘어 집안을 가득 채우는 저녁 시간이 싫었노라 조용히 고백했다.
그래서 나에게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는 일은 단순한 독서를 넘어 어머니의 인생과, 가시화되지 않는 폭력과 몰이해, 가부장적 강압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분노하며 좌절하는 경험에 다름 아니었다. 사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독자 입장에서 친절한 소설이라 보기 어렵다. 단편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은 남성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만 그들은 주인공이 아니며, 주인공을 억압하고 (영혜의 남편 ‘나’), 예술이란 명목으로 주인공을 대상화하고 성적으로 착취하는데, (영혜의 형부 ‘그’) 이는 남성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동시에 주인공 영혜에 공감하면서 그녀가 학대와 억압에 맞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저항하기를 바라는 여성독자들은, 남성화자의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의 특성상 그들 입장에서 왜곡되거나 소거될 수밖에 없는 영혜의 목소리로 인해 답답한 불편함을 느낀다. 심지어 유일하게 영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언니 인혜가 3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단편 <나무 불꽃>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첫째, 여전히 그녀 자신이 화자가 아니기 때문에, 둘째, 식물이 되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한 그녀가 자발적으로 말을 잃었기 때문에 영혜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없다.
처음 <몽고반점>을 읽었을 때 나 역시 작가 한강이, 형부인 ‘그’의 입장에서 영혜의 몸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시각적으로 착취하는 우를 범한 건 아닌지 의심했음을 고백해야겠다. 작가의 의도가 예술의 이름을 빌려 처제 영혜를 자신의 비윤리적 욕망의 수단으로 삼는 ‘그’의 부조리함과 추악함을 폭로하기 위한 것일지라도, 이것을 다름 아닌 남성의 관음적인 시선을 통해 기록하고, 묘사하고, 전시함으로써 ‘허구’가 실제적인 ‘현실’이 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는데 기여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던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남성 중심 서사 속에서 오랫동안 여성들은 함께 존재하되, ‘주체’가 아닌 ‘사물’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졌다. 우리는 여성에 관해 이야기 할 때조차 남성 화자의 목소리를 대신 들어야 했던 소설을 얼마든지 기억할 수 있는데, 작가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 까닭은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란 ‘실재적인 존재’가 아닌 ‘불가해한 타자’일 때 더 효율적으로 착취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인공 영혜는, 열등감이 있고 자기중심적인 남편 ‘나’와, 결혼 생활의 불성실함과 경제적인 무능을 예술가연한 내면적 우울로 봉합한 채 본인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형부 ‘그’가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타자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나’가 영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경멸하는 반면, ‘그’는 이해할 수 없음으로 인해 영혜를 더욱 욕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강이 두 사람의 남성 화자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영혜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라기보다, 차라리 그들 중 누구도 진실로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혜가 어째서 육식을 거부하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근본적인 원인이자 트라우마의 상징인 꿈 얘기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또한 영혜의 몽고반점에 도착적으로 탐닉하면서 식물의 생식기인 꽃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영혜와 연결되기를 열망하지만, 성적인 교합이 완결 되자 악몽의 근원에 대해 고백하는 영혜의 말을 흘려듣고 잠에 빠져든다. 한강은 두 사람의 남성 화자를 특별히 잔인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그들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의 비틀린 욕망과 비루한 일면을 드러낼 때 독자로 하여금 그들을 연민할 만한 어떤 여지도 주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아주 공정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억압의 주체이자 가해자가 연민을 유발하기 시작하면, 자신을 또 다른 피해자로 그려내고, 그로 인해 일종의 선의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 작은 선의가 퍼뜨린 ‘가여움’을 이유로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많은 악당을 손쉽게 용서했는지 생각해보라. 이것은 창작자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지만, <채식주의자>는 그런 전형적인 매커니즘을 반복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나는, <채식주의자>가 남성 화자가 주체가 되어 여성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했던 최초의 의심이 오해였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눈과 입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될 때에도 한강은 영혜의 부재를 조망하고, 피로 물든 꿈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꿈의 몸체가 된 구체적인 억압(가부정적 아버지의 강압으로 억눌린 유년시절의 기억, 학대당해 죽은 개에 대한 트라우마, 남편의 고압적인 태도와 성적 학대 등)을 낱낱이 파헤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육식으로 대표되는 폭력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식물이 되기를 희구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소설의 주인공 영혜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만큼이나 공감하고 사랑하기도 어려운 주인공이다. 그에 비해 그녀의 언니 인혜 인생의 고단함을 공감하고, 연민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표면적으로 인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장 많은 것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동생과 남편의 비윤리적인 행위로 형식적이나마 유지해온 가족이란 울타리를 잃었고, 아이의 아버지를 잃었으며, 더불어 편안한 잠과 안온한 정신을 잃었고, 영혜가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종래에는 동생마저 잃을 것이다. 그녀는 실질적 가해자의 위치에 놓인 적이 없지만, ‘만약 내가 그 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자성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게다가 인혜는 전통적인 여성 화자를 성숙하고 강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이자, 영혜에게는 없는 모성애마저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그녀를 연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혜와 쉽게 감정적 친연관계를 맺으면서도, 영혜와는 일종의 단절감을 느끼고 불화하는 까닭은 어쩌면 영혜가 우리가 익히 봐왔던 정형화된 여성 인물과 거리가 멀어서 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영혜의 ‘말없음’은 흔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에게서 대표되는 특징이 전혀 아닌데, 반대로 영혜에게 침묵은 그녀의 의지를 꺾으려는 주변의 강압에 저항하는 단호하고 다소 이기적이기까지 한 의지표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영혜를 사랑하는 일은 단연코 쉽지 않다. 어쩌면 영혜의 불가능한 소망과 기존의 도덕에 위배된 성행위, 스스로 팔을 긋고, 곡기를 끊는 일을 납득하기에는 우리가 이성적 세계에 지나치게 경도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감정이나 행동은 선행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성적 인과율의 세계에서, 영혜의 피로 얼룩진 꿈은 육식거부의 객관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꿈이란 것은 구체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혜의 자해적인 ‘식물 되기’는 그 실체 없음으로 인해 광인의 병적이고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어린아이가 실체 없는 귀신을 두려워한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우울이 때로 인간의 내면을 장악하기도 한다고 해서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실체 없는 공포가 객관적인 실체인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거대해질 수도 있다는 것 역시 믿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영혜의 자기 파괴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과 달리, 현실의 규율이나 질서를 전복하는 의지란 본래 생산적이기 어려운 법이다. 어떤 개인이, 억압적인 세계에 저항해 반대 의사를 표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그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유지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일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바람에 가깝다. 전복적인 의지는 순종적인 것과 대척점에 있고 때문에 결국은 어느 정도 자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혜가 아름답고, 현명하고, 자유로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이지 않고, 인혜처럼 자애롭기까지 했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고민 없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허구 세계에서 마저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 인물에게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 염결성을 요구한다는 것이야 말로 여성에 대한 현실세계의 억압을 되풀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 여전히 영혜를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간혹 인간이기 보다는 이름 없는 작은 풀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무가 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만큼은 깊이 공감한다. 생각해보라. 길을 걷다가 꽃을 피운 천리향 나무나 커다란 느티나무를 바라보지 않고 지나치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끊임없이 서로를 배신하고, 버리고, 죽이고, 미워하며 사랑하는 인간 외에 우리를 거들떠보지 않고도 거기에 존재하는 나무의 견고함 아래, 우러러 볼 수 있는 비인간적인 세계 앞에 멈춰 서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Chapter
- 제27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당선자 발표
- 대상(일반부) - 정유진 / <채식주의자>를 읽고 -
- 대상(학생부) - 이한나 / 부산 동여고2학년 <카피책>을 읽고
- 금상(일반부) - 박영숙 /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고 -
- 금상(일반부) - 임가영 / <채식주의자>를 읽고
- 금상(학생부) - 강우림 / 목포 덕인고2학년 <1그램의 용기>를 읽고
- 금상(학생부) - 이소현 / 제주 함덕고2학년 <7년의 밤>을 읽고
- 은상(일반부) - 박희주 /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고
- 은상(일반부) - 임문호 / <풀꽃도 꽃이다>를 읽고
- 은상(일반부) - 최윤하 / <채식주의자>를 읽고
- 은상(학생부) - 박준영 / 여명중학교 3학년 <바그다드 우편배달 소년>을 읽고
- 은상(학생부) - 임승민 / 경주고등하교 2학년 <1%로 승부하라>를 읽고
- 은상(학생부) - 조용준 / 서령고등학교 1학년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기>를 읽고
- 동상(일반부) - 노영일 / <풀꽃도 꽃이다>를 읽고
- 동상(일반부) - 백선영 / <라플라스의 마녀>를 읽고
- 동상(일반부) - 서진주 / <완벽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고
- 동상(일반부) - 손혜미 / <채식주의자>를 읽고
- 동상(일반부) - 조민정 / <채식주의자>를 읽고
- 동상(학생부) - 김명현 / 초연중 3학년 <카피책>을 읽고
- 동상(학생부) - 임하진 / 예원초4학년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읽고
- 동상(학생부) - 정다혜 / 장유초5학년 <공자 아저씨네 빵가게>를 읽고
- 동상(학생부) - 장유진 / 개금여중3학년 <7년의 밤>을 읽고
- 동상(학생부) - 조수빈 / 예원초 6학년 <구름>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