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몸과 자리 - <채식주의자>를 읽고 -
최윤하
몸은 자리를 필요로 한다. 누울 자리, 먹을 자리, 일할 자리 등등 몸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누구에게나 일정 공간은 필요하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존재가 몸인 이상 죽을 자리도 필요하다. 이 ‘자리’란 생존을 위해 한 사람에게 허락된 최소한도의 물질적 공간이면서 심리적 공간일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몸은 이 공간을 끊임없이 인지하고 욕망한다.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몸과 자리는 삶에서 하나의 짝패로 기능하며 삶의 바탕을 이룬다. 결국 몸과 자리, 둘 중에 한 개라도 충족되지 않을 때 삶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소설가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는 이 ‘자리’를 빼앗긴 후, 그 자리를 되찾기 위한 ‘몸’이 벌이는 사투를 그린 소설이다. 피와 죽음이 난무한 살생의 꿈을 꾸고 극단적인 채식을 선택하게 되는 여자(영혜)의 이야기가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주인공 영혜는 종국에는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동물성에서 식물성으로 변화를 꾀하는 이 변태에 대한 욕망은, 몸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 대한 욕망과도 같다. 자리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몸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어떻게 해서 이 자리를 빼앗기게 된 걸까? 무엇보다 그 자리를 되찾기 위한 방법이 굳이 왜 채식이었을까? 아직 몸으로 존재하는 영혜가, 언니 인혜가 생각했듯 경계 저 너머로 가버렸다면 거기가 그녀 몸의 자리인 것은 맞는 걸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첫 번째 이야기인 「채식주의자」 편에서 식탁과 냉장고가 있는 부엌이라는 공간이 주요하게 등장한 데 있다.
영혜의 남편은 영혜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p.26)였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고 남편에 대한 강렬한 혐오감이 일었다. 그가 말하는 평범함이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들어주는 수동적 태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온갖 집안일은 물론 잠자리에서의 성욕까지, 아내는 자신의 욕망을 해소해주는 배출구로만 그에게 인지됐다. 이런 일방통행적 관계는 폭력과도 같다. 영혜의 극단적인 채식은 이 폭력에 맞선 투쟁으로도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편에서 보자면 영혜의 채식이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또 다른 폭력, 즉 자해로 보인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 이중의 폭력을 이해하려면 부엌이라는 공간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상징들이 필요했다.
소설에서 영혜는 흡사 귀신과 같은 모습으로 냉장고 앞에서 첫 등장한다. 냉장고가 있는 자리, 즉 부엌에서부터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부엌은 사회적으로 영혜의 몸이 허락된 유일한 자리였다. 욕망의 주체로써 영혜가 원했던 자리는 진정 아니었을 것이다. 사회적 성공에 목맨 남편의 욕망은 허락되는 것과 달리 그녀의 욕망은 평범한 가정주부 역할에 갇혀 있었다. 한 사람의 몸에게 허락된 자리가 좁디좁은 부엌이라니, 마치 부엌이 몸을 가두는 감옥처럼 여겨졌다. 그 공간의 협소함에 나는 문득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비단 영혜만이 그렇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욕망의 주체로써 살기보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거대한 주체의 욕망을 해소해주는 하나의 대상으로 딱 그만큼의 자리만 허락된 생활 속에 갇혀 있다.
영혜의 언니 인혜는 그런 우리를 대신한다(세번째 이야기 「나무 불꽃」). 여대 근처에서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는 그녀의 성공과 그 성공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 안에서 평가되고 의미 매겨지어질 뿐이다. 비디오아티스트인 그녀 남편이 아내의 성공을 자양분 삼아 예술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그녀 또한 욕망의 주체로써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인혜는 동생처럼 이와 같은 사실을 전면 부정하고 몸으로 그것에 맞서지 않는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인혜의 이런 선택은 그처럼 사는 사람이 대다수인 현실에 빗대어 비교적 쉽게 이해가 된다. 그저 인혜가 현실을 견디기보다(p.197) 현실 이편에서 욕망의 주체로써 부엌을 제외한 몸의 자리를 꼭 찾아내기를, 그녀에게 강한 동질감을 느끼며 바랄 뿐이다.
문득 썰물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미끄러지듯 밀려나갔어. 식탁이, 당신이, 부엌의 모든 가구들이. 나와, 내가 앉은 의자만 무한한 공간 속에 남은 것 같았어. -p.28
영혜가 꾸는 꿈의 내용 중 일부분이다. 부엌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제적 억압과 자본주의적 욕망이 물러난 자리에는 무한한 공간이 찾아들지만 이는 오히려 그녀의 자리가 현실에는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부부동반으로 초대된 남편 회사 사장 집에서 사람들이 둘러앉은 넓은 식탁에서도 영혜의 자리는 없었다. 아니, 육식을 탐하는 그 식탁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욕망의 희생양으로써 몸이 존재함을 씁쓸하게 증명하고 있다. 영혜의 온 가족이 둘러앉은 영혜 어머니의 생신상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부장제적 억압과 폭력은 그 어느 곳도 그녀(들)의 자리가 아님을 확인시켜준다. 몸 둘 곳이 없는 사람들, 그 쓸쓸함의 정서가 이 불편한 이야기 속에 깊게 배어 있다.
자해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 극단적인 채식(식사거부) 끝에 영혜는 나무되기를 희망한다. 소설가의 의도대로 육식이 폭력의 역사를 의미한다면 영혜의 자해적 채식은 그것에 대한 속죄의 행동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죄가 이루어지는 자리 또한 현실에서 허락되지 않아서 영혜는 나무로 변태하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른다. 베란다에서 가슴을 열어젖히고 햇볕을 쬐는 영혜의 모습은 속죄와 구원의 이미지로 수렴된다(두 번째 이야기 「몽고반점」).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p.104)이지만 생명의 강렬함만은 그대로인 몸이야말로 그 무엇에도 위협받지 않을 자리가 필요하다. 나무의 자리처럼 말이다.
인혜는 이 모든 게 꿈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이 모든 게 꿈이라면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꿈이기에 자리 없음을 견뎌낼 수 있었다는 변명이 통했을지는 모르나 진짜 현실에서는 이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몸이 필요로 하는 자리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이는 존재하기 위해 고정불변의 자리를 필요로 하는 나무의 욕망과도 같다. 온 몸으로 식사를 거부하는 것으로 영혜는 우리에게 주체로써 몸의 자리를 찾아내라는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이 신호에 응답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희생양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껏 내 몸이 현실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마도 이후의 내 삶은 몸의 자리를 찾는 일로 채워지지 않을까 싶다. 넓지도 좁지도 않으면서 내 몸에 꼭 맞는 자리. 거기서부터 삶을 뿌리내리고 싶다, 흔들림 없이. 생명의 강인함으로 푸르른 숲처럼 불타오르고 싶다.
Chapter
- 제27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당선자 발표
- 대상(일반부) - 정유진 / <채식주의자>를 읽고 -
- 대상(학생부) - 이한나 / 부산 동여고2학년 <카피책>을 읽고
- 금상(일반부) - 박영숙 /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고 -
- 금상(일반부) - 임가영 / <채식주의자>를 읽고
- 금상(학생부) - 강우림 / 목포 덕인고2학년 <1그램의 용기>를 읽고
- 금상(학생부) - 이소현 / 제주 함덕고2학년 <7년의 밤>을 읽고
- 은상(일반부) - 박희주 /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고
- 은상(일반부) - 임문호 / <풀꽃도 꽃이다>를 읽고
- 은상(일반부) - 최윤하 / <채식주의자>를 읽고
- 은상(학생부) - 박준영 / 여명중학교 3학년 <바그다드 우편배달 소년>을 읽고
- 은상(학생부) - 임승민 / 경주고등하교 2학년 <1%로 승부하라>를 읽고
- 은상(학생부) - 조용준 / 서령고등학교 1학년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기>를 읽고
- 동상(일반부) - 노영일 / <풀꽃도 꽃이다>를 읽고
- 동상(일반부) - 백선영 / <라플라스의 마녀>를 읽고
- 동상(일반부) - 서진주 / <완벽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읽고
- 동상(일반부) - 손혜미 / <채식주의자>를 읽고
- 동상(일반부) - 조민정 / <채식주의자>를 읽고
- 동상(학생부) - 김명현 / 초연중 3학년 <카피책>을 읽고
- 동상(학생부) - 임하진 / 예원초4학년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를 읽고
- 동상(학생부) - 정다혜 / 장유초5학년 <공자 아저씨네 빵가게>를 읽고
- 동상(학생부) - 장유진 / 개금여중3학년 <7년의 밤>을 읽고
- 동상(학생부) - 조수빈 / 예원초 6학년 <구름>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