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7238

욕망의 자화상을 마주하다 - <채식주의자>를 읽고 - 

 

                                                                                                                                             손혜미

 

[채식주의자]의 맨부커 상 수상 이후 작품을 읽은 주변 사람들 대부분의 반응은 ‘불편함’이었다. 왜 이 작품이 상을 받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도 했다.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가 이 작품에 지지를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 자체를 불결하게 여기는 태도는 문제가 된다. [채식주의자]가 그렇게나 야만적이고 음란한 이야기인가. 인간의 욕망에 관한 문제는 특정 시기에 국한된 시대적 과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며 우리를 고민하게 하는 근원적인 문제다. 충격적인 신문 기사를 읽은 것처럼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모두들 욕망을 내려놓고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욕망을 거세당한 걸까. 우리는 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성소수자, 여성, 이주노동자. 수많은 이름 뒤에 ‘욕망’이라는 이름이 더해진다. 그러나 모든 욕망이 미움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욕망은 합리화되고 어떤 욕망은 억압당한다. 이 모든 욕망을 잘 통제하면 일상의 평온함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은 폭력성이 내재된 욕망들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해왔다. 인간의 주요 욕망 중 하나인 식욕은 생존의 문제와 결부되기에 사람들은 그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를 당연시 여긴다. 요즘은 ‘먹방’이라는 형식으로 욕망을 앞 다투어 분출한다. 그러나 식욕은 폭력적일 수 있다. 영혜의 아버지는 딸을 문 개를 실컷 때려주는 것만으로 복수를 끝내지 않았다. 잔인함은 부성애의 크기와 무관하다. 안타깝지만 어린 영혜에게도 연민의 마음은 없었다. 자신을 문 개를 향한 분노로 영혜는 아버지와 공동정범이 되어버린다. 복수는 개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먹는 행위로 이어진다. 이것은 잔인한 폭력이다. 여성 혹은 남성에게 가해지는 성적 폭력과 동네 상권이나 소자본을 파괴하는 행위 등을 ‘먹다’라고 표현하는데, 이런 표현들은 식욕에 내재한 폭력성을 보여준다.

 

영혜는 사람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욕망들을 불편하게 여긴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브래지어는 유두를 감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가슴을 시각적으로 부풀리는 기능도 한다. 성적 매력을 과시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연실색할 일인가. 잔인하게 도륙 당한 소의 가죽으로 만든 명품 가방을 옆에 놓고 핏물이 어린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곱게 잘라 입에 넣는 사람들을 본다. 가죽 가방과 스테이크는 진정 합리적인 욕망인가. 인간은 우아하고 세련된 현대인이 되려고 얼마나 많은 폭력을 자행해 왔는가. 옷장에 쌓인 코트와 가방을 보고 있으니 이 한 마디가 생각난다. 내 죄가 산보다 높구나.

 

영혜는 올바름을 온몸으로 구현한다. 역설적이지만 올바름이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믿을 때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무례해진다. 그러나 영혜의 행위는 그러한 오만함으로 치부될 수 없다. 영혜는 지난 날 자신이 혹은 인류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참회록을 사력을 다해 쓰고 있다. 그 참회록의 결말은 욕망 없는 식물이 되는 것이다. “죽으면 안 되는 거야?”라는 영혜의 물음은 수많은 생명을 소비한 인간들을 향한 처절한 반항이다. 

 

폭력성을 외면하고 합리화해 온 욕망이 있는가 하면 불온한 것으로 여기며 억압해버린 욕망도 있다. 함부로 쏟아내는 욕망은 불온하지만 개인의 내면에 은밀하게 존재하는 욕망까지 불온하다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을 씹어 삼키는 욕망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 처제를 향한 욕망은 문제가 되는가.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그렇다면 사랑과 신뢰가 아닌 의무감만으로 부부로 살아가는 일은 인간의 도리에 합당한가? 인혜는 지우에게 우리 집에 아빠는 없다고 말했다. 동생 영혜와 남편의 일 앞에 인혜가 무너지는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껏 쌓아올린 성이 무너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은밀한 욕망을 무조건 긍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욕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다. 폭력적인 식욕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왜 배우자의 친족을 향한 욕망은 문제가 되는가. 적어도 후자는 생명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이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하는지는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에 사로잡혔을 뿐인 한 개인의 도덕성을 짓밟는다. 사람들이 생산해내는 추문의 본질은 자신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은밀한 욕망을 기어코 실현해버린 영웅을 향한 질투는 아닐까. ‘그’의 욕망이 영혜와 결합했지만 어떤 생명도 훼손되지 않았다. 아닌가? 인혜의 가정이 무너졌는가? 그렇다면, 영혜와 ‘그’의 ‘기행’으로 고통 받는 인혜는 순수한 피해자인가? 아니다. 인혜와 영혜와 ‘그’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지난한 고통의 서사를 함께 했다.

 

인혜는 욕망을 통제하면서 바르게 살아왔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그녀는 가장 선한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 왔고, 그렇게 동생들을 돌보던 관성으로 무너질 것 같은 ‘그’를 남편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그녀는 평온한 일상을 누리기 위해 평온하지 않은 것들을 외면해 버렸다. 인혜의 어린 시절이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나름의 평온을 유지했던 것은 영혜의 고통을 제물 삼았기 때문이다. 무너질 것 같은 남자와 결혼했다지만 사실 남편은 교육자와 의사가 대부분인 집안의 아들이다. 그녀는 성실하지만 스스로를 최악으로 내던지면서까지 자신의 역할을 감내하지는 않는다. 그런 비겁함마저 그녀는 성실하게 이행한다. 아버지에게 술국을 끓여주며 영혜의 고통을 외면했던 것처럼 아들 지우를 지키기 위해 일상을 유지할 힘이 없어 보이는 남편을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온화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근본적으로 선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 속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인혜는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에게 굴무침을 해 줄 뿐 왜 육식을 거부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영양 공급이 부실한 동생에게 단백질을 공급해 주는 성실한 언니의 역할을 다할 뿐 동생의 고통 속에 뛰어들지는 않는 것이다. 영혜를 미워했다고 말하는 인혜의 고백에서 드러났듯, 이후 인혜가 영혜에게 해 준 모든 것들은 같은 맥락 속에 있다. 

 

인혜를 너무 몰아세운 것 같다. 사실은 자아비판이다. 욕망을 통제하며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은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대부분이 인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평온하게 유지되는 이 세상이 방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일들을 상상한다. 혹시 누군가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섣불리 비난하진 않겠다. 자본에 의해 소비되는 욕망은 긍정하면서 위태로운 한 인간을 지탱해 준 에너지를 불결하게 여기는 건 가혹하다. 그의 은밀한 욕망 속에 감추어진 삶의 상처를 사유해야 한다. 공감과 상상력, 문학의 쓸모가 거기에 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상을 돌아봐야겠다. 이토록 평온한 하루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분명, 완전무결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어떤 참회록을 써야 하나. 타인의 욕망을 혐오하지 않도록 공감 어린 사유를 할 것. 그러나 회색분자로는 살지 않기.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잊지 않는 욕망만을 추구할 것. ‘배려’와 ‘올바름’의 가치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를 영민하게 판단하기. 무엇보다 내게도 흠결이 있음을 매 순간 잊지 않으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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