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영광독서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5759

사랑 쪽으로 몸 기울이기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고

 

해운대구 좌3동 조영남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어렸다. 우연히 시내에 나갔다가 데모 대열에 떠밀려 최루가스에 눈물 콧물을 쏟으며 느닷없이 닥친 상황에 짜증스럽게 반응하던 철없던 사춘기 소녀였다. 단지 무성한 소문들에 대한 진위여부에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때, 알 수 없는 엄청난 분노의 인파 속에 밀려다니며 겪었던 사건은 훗날 내가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얼마 전 나는 격변의 시대의 한 가운데를 지나온 청춘들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혹은 그들의 친구이거나 연인이거나 혹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뿌연 연기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후다닥 뛰어다니던 발자국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한동안 환청을 경험하기도 했고, 데모 대열에 밀려 가방과 신발을 잃어버리고 멍하니 서 있던 윤의 모습에 초라하게 내가 겹쳐졌던 건 청춘의 한때를 치열하게 혹은 눈물 나게 살아낸 그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빚진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여기, 우정과 사랑사이에서 죽음과 삶 사이에서, 고통과 안온함 사이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이 있다. 격변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며 오늘을 잊지 말자고 애쓰는 모습들이 참으로 처연하다. 청춘의 한 때를 죽음과 고통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오늘을 잊지 말자는 다짐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확인 시켜주는 것은, 사라진 애인을 찾다가 절망하고 분신으로 항거한 미루의 언니처럼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을까, 불투명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갈팡질팡하면서도 답을 찾아가는 청춘의 한 때를 그렇게 지나온 것이다. 윤, 명서, 미루, 단이, 그리고 그러한 청년들을 바라봐야 했던 윤 교수. 어느 날, 윤 교수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크리스토프인가? 아니면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그때의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함을 느낀다. 현재에 우리가 있기까지 앞 서 살다간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우리들은 업혀 온 아이일 수도 있을 테고 지금 이 수간에도 누군가를 업고 강을 건너는 크리스토퍼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그 빚을 조금이라도 돌려주는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해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암울한 시대를 살아낸 이 땅의 수많은 윤, 명서, 단이, 미루를 생각해 본다. 청춘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했다. 그 곳에 이별이 있었다 한들, 아픔이 있었다 한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있었다 한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라는 것, 그들이 보아야했던 부당하고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질문하고 회의하고 영원히 따라붙게 될지도 모르는 그때 내가 무얼 했나 하는 자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도 그들은 뜨겁게 살아내었음을 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 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란다는 윤 교수의 말은 그래서 큰 위안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일들에 대해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해도 그때의 느낌이나 감정만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세상은 명사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동사나 형용사적 틀인 셈인 것이다. 신경숙은 시대적 유감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역사적 수레바퀴 아래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받았던 고통이나 고뇌, 방황이나 죽음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볼 수 없어서 너무 아름답게만 그리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가는 현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치열하고도 진지하게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나 또한 80년대를 살아낸 사람으로서 시대적 불의 속에서 그것을 뚫고 나가고자 했던 그들의 진짜 삶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인물들의 몰개성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삶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섬세하고도 따뜻한 손길을 끝까지 놓지 않고 슬픔을 딛고 사랑 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 애를 썼다는 작가의 말은 이 소설의 의도된 바를 잘 나타내주긴 한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살아있는 자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전언이 아닐지라도 그저 견디어 내는 것만으로도 생은 아직 청춘이 아름다운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위로 받아 본다. 가장 안타까웠던 건 사랑하면서도 같이 있으면 서로를 훼손할거라며 부러 멀리 달아나버리는 명서를 선뜻 붙잡지 못하는 윤의 사랑을 보면서 마음이 짠해지는 건 나또한 그러한 경험을 갖고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고 나 또한 그 누군가를 걱정하는 관계망 속에서 우리는 성장함을, 또한 서로가 서로를 찾는 일은 생명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소설을 덮으면서 가슴 깊이 공감해본다. 나, 그 쪽으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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