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6572

타워 팰리스가 아닌 그 곳

"구멍가게" 를 읽고

 

 

얼마 전 연합뉴스에서 <로또 관련 설문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로또에 당첨됐을 때, 가장 살고 싶은 집은 서울 도곡동의 ‘타워 팰리스’, 가장 갖고 싶은 차는 BMW라는...나 역시도 가끔 로또를 사고 또 살 때마다 백만장자가 되는 상상을 자주 한다. 100평정도 되는 최고급 빌라를 사서 이태리 가구로 멋지게 장식하고 매일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거품목욕을 하고, 또 근사한 외제차를 타고 기름값 걱정 없이 방방곡곡을 누빌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실 속에서 힘든 상황과 맞닥뜨릴때, 내가 도망치는 꿈속의 그곳은 ‘타워 팰리스’나 ‘BMW'로 장식된 어마어마한 빌라가 아닌,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바로 그곳이다. 45도. 각도로 기울어진 언덕배기에, 슬래트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옆으로 더러운 하수가 흐르는, 사방에 가난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바로 그 동네. 슬래트 지붕아래서, 어머니는 부업 삼아 방안 가득 쌓여진 벙어리 장갑을 깁고, 조수 격인 여덟 살짜리 나는 쪽가위로 장갑에 붙어 있는 실밥들을 싹둑싹둑 잘라내고 있다. 옆에서는 장갑 깁다 지친 할머니께서 탁주 한 사발과 김치 한 조각으로 피로를 씻어내고 어린 동생들은 할머니께서 갖다 준 멸치 몇 개와 찬물 한사발로 주린 배를 채운다. 그러다가 쪽가위에 손가락이라도 베이면 그 아픔으로 인해 꿈에서 깨게 되고 눈을 떠보면 다시 서른 일곱의 내가 태아처럼 웅크린 채 떨고 있다.

 

만약 주위에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어 ‘힘든 순간마다 과거로 도피하는 나의 얘기’를 듣는다면 그는 분명 나에게 ‘문제가 많은 현실 도피적 성향이라고 말한 뒤 ‘정신분석 요망’이라는 단어를 덧붙일 것이다. 하기야 혼자 생각해봐도 이런 성향은 분명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현실에 대한 자신감 부족’에서 나온 심리적 현상이라고 밖에 분석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과거 회귀적 성향’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마흔, 아니 쉰이 된다 해도 계속 그 성향을 사랑하지 싶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추억은 ‘엄마의 품속’같고 ‘요람’같기도 하고, 그리고 가슴 한구석에 걸어놓고 두고두고 위안 받을 ‘한 폭의 그림’같은 존재이기에...

 

‘구멍가게’는 ‘정근표’라는 작가가 쓴 자서전적인 책이지만 사실은, 그 시절을 보냈던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자서전이다. 손등이 거북 등처럼 갈라져 피가 군데군데 말라 있고, 누런 코는 한 뼘이나 빠져 들이마실 때마다 후루룩 소리가 나고, 발목엔 시커먼 때가 딱지처럼 눌러 붙어 있던 우리들, 그 우리들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것이다.

 

월말이 되면 비어 가는 쌀독을 보고 한숨지으며 사방으로 돈을 꾸러 다니고, 꺼진 연탄불을 되살리기 위해 번개탄을 사다 나르기도 하고 가끔씩은 연탄가스에 중독돼 물김치를 사발 채 들이키던 그 시절. 여름이면 아이스 케키가 먹고 싶어 애간장이 녹고 겨울이면 찹쌀떡 장수의 고함 소리에 군침 삼키느라 잠 못 이루며, 삶은 달걀 몇 알과 사이다 한 병이면 최고의 소풍이 되던 그 시절.

 

그 시절의 우리는, 가진 거라곤 비쩍 마른 몸뚱이와 가난뿐이었지만 마음만은 아랫목처럼 정말 따뜻했던 것 같다. 비록 가난으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가족끼리 혹은 이웃끼리, 꽁꽁 얼어붙은 손을 마주 잡고 화목과 사랑으로 그 세월을 견뎌냈기에 오늘의 우리는 그때보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조금은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가난 때문에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어딘가에 있을 꿈을 찾아 부단히 노력했기에 우리는 지난 시절을 고통스런 마음이 아닌 뿌듯한 마음으로 회상할 수 있는 것이다.

 

또 과거라는 그림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의 부모님일 것이다. 새벽4시에 일어나 의복을 갖춘 뒤 통행금지 해제와 동시에 꽁꽁 얼어붙은 겨울을 뚫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시장으로 달려가던 아버지. 짐칸에 온갖 부식재료를 잔뜩 싣고, 달려왔던 길을 힘겹게 힘겹게 되돌아 오시던 그 아버지. 자신의 새 팬티를 아들에게 내어주고 당신은 아들의 낡은 꽃무늬 팬티를 입으시던, 좋은 것은 뭐든지 자식에게 다 주고 싶어 하던 그 아버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일년 열 두 달,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가게를 벗어나지 못하던, 구멍가게에 한쪽 발목이라도 묶어놓은 듯 살아가던 가엾은 어머니. 자식들 잘 키워보겠다고 제대로 아랫목에 누워 보지도 못하고, 늘 몸살기 있는 무거운 몸으로 하루하루를 보람으로 버텨가던 그 어머니가 계셨기에 우리는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또 우리 자식들에게도 그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장애를 지닌 몸으로 광고지를 돌리고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경로당에 쌀과 연탄을 남모르게 전달하는 ‘식이 아재’와, 식이 아재가 기아와 추위로 사경을 헤맬 때, 얼음장 같은 방에 불을 지펴주고 음식까지 챙겨준 선량한 이웃이 있었기에 그 시절은 더 아름다웠던 것 같다.

 

사실 ‘구멍가게’는 가슴속에 단번에 각인될 만큼 획기적인 작품은 아니었다. 사람을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놀라운 재료도 없었고, 읽는 재미를 줄만큼 수려한 문장을 지니지도 못했으며, 독자를 주눅 들게 할 꽉 짜여진 구성의 다부진 책도 아니었다.

 

그저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법한 일들을 나열식으로 줄줄이 엮어놓은 너무 평범해서 조금은 실망스럽기 조차한 그런 책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책의 첫 장을 펼쳐서 덮던 그 순간까지, 가슴 한구석에서 잔잔하게 물결치는 따뜻하고도 구수한 작은 일렁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 물결은 한 겨울, 과일칼로 생고구마를 깍아 내 작은 입속에 넣어주시던 할머니의 살내음 같기도 했고 하루 종일 일속에 묻혀 살던 어머니의 땀내음 같기도 했다. 한마디로 ‘구멍가게’는 우리의 지난 시절을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책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일회성의 특성을 지녔기에 그 특성만으로도 존재의 가치를 톡톡히 하는 것 같다.  지나간 시간 속의 기쁨, 울분, 한숨, 눈물은 각각 한가지씩의 색깔과 음영이 되어 때로는 ‘봄바람에 취한 강나루’같은 고운 수채화를 완성시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뭉크의 ‘절규’같은 음습한 그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이 어떤 형태를 지녔건 간에 그건 우리의 숨결과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그림이기에, 우리는 그 그림을 가슴속에 영원히 붙여놓고 그리움의 시간마다 그것을 꺼내어 감상하고 또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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