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9364

감정이 깊으니 기억도 오래 남는다 -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고 - 

 

                                                                                                                                             정지홍

 

사람 속에 있는 마음, 온갖 감정들이 뭉쳐진 조그만 덩어리 하나가 명치 어디쯤에서 숨 쉴 때마다 아릿해 지는 그곳의 정체가 궁금하다. 업무 시작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른 출근으로 책을 읽은 지 수년째다. 하루에도 몇 번씩 파도처럼 넘실대는 기분에 아랑곳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길을 가게 했다. 그럼에도 오늘, 아니 며칠 째 감정수업 읽기는 느린 걸음을 하고 있다.

 

물론 당장 읽고 싶지 않은 까닭도 있다. 맛 난 음식을 곳간에 두고서 조금씩 꺼내먹는 맛이다. 귀한 물건을 벽장에 숨겨 두었다가 살짝 꺼내보는 재미, 이 책에는 그런 매력이 있다. 심오한 철학 하나가 사연 깊은 소설과 만나 토론을 벌인다. 독자는 자신에게 묻혀있던 감정조각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깊은 연못에서 끌어올린 언어들의 조화를 즐겁게 음미한다. 하지만 오늘 느린 걸음은 종류가 다르다.

 

후배와 통화 중에 우연히 녀석의 소식을 들었다. 이미 만나 술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노라고. 그 후배 말고도 녀석이 각별하게 예우하던 선배를 포함해서 몇몇 지인은 연락이 된다고 했다. 녀석은 내 전화만 받지 않는다. 한 달쯤은 지났을 거다.

 

스마트폰 밴드에서 댓글을 주고받던 중 사소한 오해가 큰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녀석은 모임에서 탈퇴를 했다. 폰에 달린 글만 가지고 사람 마음을 읽으려다 낭패를 본 사례를 남긴 거다. 나와 연루된 사건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임에 회의를 느낀다던 녀석은 당분간 모임과 인연을 끊고 자기 생활에만 전념하겠다는 소식만 얻어 들었다. 녀석의 안부가 궁금해 몇 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모두에게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 전화만 받지 않는 거였다.

 

내 속이 어두워 졌다. 배신, 수치, 분노, 슬픔, 외로움 등, 참을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솟구쳤다. 분명 나와 관련된 다른 이유가 있었겠다. 그렇다고 말 한마디 없이 나만 외면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녀석은 고교 1년 때부터 삼십 여년을 친구로 지내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런 녀석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한참을 치를 떨었다. 조절할 수도, 다스리기도 힘에 겨운, 그건 분노라는 감정이었을 거다.

 

책을 펴 들고서 내 안에 바글거리는 분노의 정체를 파고들었다. 순간 울컥하던 감정의 본질은 수치심이라는 설명을 읽었다. 녀석에게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떨고 있는 건 분노가 아닌 수치심 때문이라는 거다. 그랬다. 잠깐 '우리'에서 밀려난 나는 수치심으로 떨고 있었던 거다. '나만 무시당하고 있는' 느낌을 누군들 견딜까? 분을 삼키는 속을 들킨 것 같아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삼십 년 우정에 금이 가도록 만든 혼란한 상황을 자꾸 떠올려 봤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녀석과 마지막 나누던 통화에서 서로의 오해가 이런 결과를 가져다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궁금했다. 어쩌면 후배나 선배, 그리고 나를 제외한 전화를 받아주는 녀석의 측근에게는 속마음을 다 얘기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미치니 더 소외되는 걸 감당하기 힘들다. 그 틈에 끼지 못해서 못 견뎌하는 이 감정은 질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관계에서나 일어나는 질투 일 텐데, ‘내 친구이니 건들지 마’라며 나설 수 없는 불편함이 내 마음이었을까? 특히 한 선배에게는 퍽이나 조심스럽던 녀석의 행동이 괘씸하게 떠올랐다. 내가 친구로서 많이 모자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질투는 슬픔과 외로움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모든 걸 놓고 돌아올 날만 기다리기로 했다. 그럼에도 나 혼자 생각뿐이라는 이 사실과 느낌이 싫었다.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대기만 할뿐, 얼굴 맞대고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진실, 그것이 나를 밀어낼 분명한 카드가 될 것이다. 틀어진 감정 조각 하나가 빌미가 되면, 수군거림은 현실이 되어 미운털이 뽑히는 것처럼 '나' 는 그들 사이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왠지 멀어질 것 같은 그게 두려움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 책을 읽는다. 깨알같이 작은 언어 하나로 새롭게 눈을 뜨며 치밀한 논리로 구성된 세계를 보고 또 읽는다. 가슴이 여리지 않도록, 닳아 사라지지 않도록 믿음의 방패를 그렇게 세워본다.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정성을 다한다. 웃음과 진지함으로, 그 사람 눈보다 낮은 곳에서 균형을 맞추려 애쓴다. 실없는 짓이 아니길 바라지만 돌아보면 두려움은 또 그 자리에?있다. 주먹 꼭 쥔다고 비켜 가지도, 자신감이 머물러 있지는 않는 모양이다. 사소한 다짐이었는지 너무 쉽게 사라진다.

 

책 한 권을 몇 년에 걸쳐 반복해서 암송하듯 읽는 사람들을 본다. 무딘 마음을 단근질 하고, 변화무쌍한 세상에 대처하려는 사람들의 숨겨진 노력이겠다. 이들은 곧 알고 나서 얻는 기쁨과 행복의 경험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그 기쁨도 유효시간이 지난 현실은 다소 어둡고 답답하겠다. 등불처럼 책을 들고 다니면서 갈 길을 밝힐 수는 없고, 필요할 때마다 빛이 나도록 자동 충전이 필요할 텐데, 그게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게 꾸준한 독서이겠다.

 

그 사람에게 많은 감정이 쌓이게 된 것을 몰랐던 것도 세상을 너무 쉽게 본 결과다. 땀 흘려 얻으려 하지 않았던 과거는 지금처럼 후회만 남긴다. 어려운 처지에서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는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만큼 비참할 때가 없다. 이 책에서는 후회하게 되는 원인을 대부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에 극구 반대한다. 어린 가슴에 박힌 게으른 심성도 사실은 환경적 영향이 대부분인 것을, 굳이 스스로를 상처내서 아파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모자라면 다시 채우려 노력하는 지금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다. 주변이나 남을 탓하는 것 또한 누워서 침 뱉으며 세월만 좀 먹는 행위 같다. 그리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나 아파하지는 말자. 그 시절 아이의 잘못은 아니니까.

 

치부를 뜻하기도 하며, 용의 머리 뒤쪽에 반대로 된 비늘 방향을 역린이라고 했다. 내가 뱉은 말 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 녀석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랬다면 그는 분명하게 그때를 기억하며 지금의 결과에 꼭 다문 입술로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그게 뭔지 모르는 나만 오직 오랫동안 속을 태우게 될 것이다. 한 가지씩은 누구나 갖고 있는 치부이자 약점을 장난이라도 건드리면 그 사람의 갑작스런 철퇴를 맞을 수도 있는 법이라고 했다. 타인의 역린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세상에는 만만하고 쉬운 사람은 없다는 것을, 있다 해도 건드리지 않아야 할 것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평소 신중하지 않게 말을 골라 할 줄 몰랐던 자신을 떠올렸다. 악한 감정은 아니었지 , 그의 깊은 곳까지 세밀하게 살폈더라면 좋았겠다. 역린이 이 상황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 열쇠가 된 듯하다. 미리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어리석음 이겠다.

 

녀석에게 전화를 걸면 몇 번 신호음이 울리고, 일부러 끊기를 누르는 손길을 확인한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도 모임에서 탈퇴를 했다. 나 때문에 녀석은 제 삶의 한 조각을 버렸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유지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슬픔인지, 이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견디기 힘든 비루함이었다. 미간에 주름이 더 깊어질 것 같다. 

 

거의 한 달에 걸친 여행길에서 돌아왔다. 마흔 여덟 가지의 감정의 본질을 찾느라 많이 헤맸다. 여전히 기쁨도 행복도 얻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스피노자를 휴머니스트라고 소개해 주었다.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고 칼 같이 가를 줄만 아는 이미지의 철학은 여리거나 따뜻한 느낌의 감정과 부딪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읽는 동안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 솟구치는 가슴속 언어는 한 경우를 두고도 여러 느낌을 가진다. 잔잔한 물결 같은 감정을 유지하기도, 뛰는 감정을 잡아내기도 쉽지 않다. 가라앉은 감정을 북돋을 줄 몰라 못난 스스로를 얼마나 많이 비난했던가. 강신주는 말한다. 이성의 잣대로 감정이 말하는 것을 걸러 내려하면 독이 될 수도 있음을. 감정이 원하는 대로 좋은 것을 택하며 스스로를 안아줄 때, 마음은 늘 행복한 때에 머물게 되는 것을. 그러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이 책은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무겁고 두꺼웠지만 읽는 동안은 행복했다. 문학과 철학이 만나는 다리 위에앉아 눈을 감고 가슴에 고이는 얘기들로 입은 한참이라도 수다를 떨고 싶은 기분이었다. 언제 다시 이곳 여행지로 돌아올지 기약은 없다. 다른 여정을 찾아 떠나는 게 지금처럼 아쉬워 지는 적이 없다. 그래도 떠나야 한다. 따뜻하고 열정 넘치는 글자들과 씨름하던 2014년 뜨겁던 계절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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