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9362

어느 부산 아지매의 전통시장에 대한 고찰 

- <살아남은 것들의 비밀>을 읽고 -

 

                                                                                                                                             김서영

 

나의 가을은 이렇게 시작된다. 8월 중순이 넘어 영광도서에 들러 그해 영광독서감상문 현상공모용 도서 목록을 훑어보고 책을 한보따리 사오는 일.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감상문을 쓰다보면 어느새 낙엽은 쌓인다. 이런 ‘나만의 가을나기’가 올해로 여섯 해째. 올 가을 사들인 여러 책 중 내 눈에 꽂힌 책은 「살아남은 것들의 비밀」이다. 절박한 위기에서 아슬아슬 탈출하여 ‘살아남은’, 이 행운의 ‘것들’은 무엇이며 도대체 어떻게 살아나게 되었을까?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나 (살아남은)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는 메시지를 담은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나 박 이문의 동명 소설과 관련 있는 게 아닐까하는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며 책을 더듬었다. 

 

한 문장으로 하면 이 책은 ‘길의 여왕’ 이랑주가 직접 발로 뛰며 쓴 세계 시장 생존 보고서다. 국내 1호 비주얼 머천다이저로 유명백화점의 명품관을 박차고 전국의 전통시장과 지하상가, 노점상을 누비며 수많은 상인을 만나고 여러 점포를 찾은 저자는 불현듯 세계 일주에 나선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투어, 고성 투어가 아닌 시장투어다. 그이는 2012년 1년간 40여 개 나라 150여 곳의 전통시장을 다니며, 오랜 시간 고객에게 사랑받고 있는 여러 시장과 상인들을 만난 사례들과 그들에게 배운 장사 철학을 ‘비주얼’하고 ‘비비드’하게 이 책 속에 담아놓았다. 연중 내내 축제가 열리는 영국의 코벤트 가든, 엄마가 가족에게 주고 싶은 것만 파는 핀란드 안톤 앤 안톤 슈퍼마켓, 평범한 피클에 표정을 담아 ‘명품 피클’을 만든 가게, 대가리를 쳐드는 생선 진열을 통해 매출을 팍팍 올린 어느 어시장, 책과 함께 간장을 파는 일본의 츠타야 서점, 재고 파본 도서를 파는 독일의 조커스, 눈으로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독특한 경험을 선사해 주는 뉴욕 소호의 쇼윈도들, 독특한 진열과 독창적인 홍보 전략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터키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와 이집션 바자르 등 여러 시장과 가게들의 갖가지 성공 사례를 이 책에서는 만날 수 있다. 그이는 이렇게 ‘살아남은’ 시장을 답사하며 우리나라 전통시장이 ‘살아남을’ 비결을 제시하고 있다. 행복은 바로 우리 옆에 있다 진리를 전해주는 파랑새의 이야기처럼 그 성공 비밀은 책 이 곳 저 곳에 널려져 있다. 그이와 함께 세계 곳곳의 시장을 걷고, 보고, 시장에서 놀고, 사고, 먹고,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내 기억은 내 유년기의 시장으로 향한다. 나는 진주시내에서 버스로 30분 가야하는 시골이 고향이다. 코흘리개 때 엄마 따라 시장에 가보는 것이 꿈이었다. 엄마가 시장 다녀온 후 함지박 속에는 갖가지 진귀한 것들이 넘쳐났고 도대체 어떤 도깨비가 방망이를 가지고 노는지 보고 싶었다. 꼬불꼬불한 길에, 하얀 먼지를 쓰고 붕붕거리는 버스를 타는 것이 고역쯤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드디어 엄마의 손을 잡고 시장이라는 데를 가게 되었다. 이른 봄에 고사리 손으로 쑥을 캐서 팔러 가는 길이었다. 그 쑥의 대가로 과일칼과 소쿠리 등의 자본재를 사서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한 게 초등 3학년은 되었을까? 거래 후 후미진 골목 안에서 엄마가 사주신 우동은, 그 후로는 다시 맛볼 수 없었다. 산해진미가 들어간 지금의 우동도, 그 시절의 멸치다시진한 우동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지천명이 가까운 이 나이에도 그 맛을 그리워하니 아마 음식 맛의 절반은 추억과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추억이 있는 곳, 그것이 시장이었다.

 

공부를 잘 하거나, 글짓기를 잘해 상을 받으면 시장에 데려다 주시기도 했다. 여름에 모녀가 시장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과수원에서 바로 공수해온 복숭아를 사먹고 있는데 갑자기 벌레가 기어 나와 기겁을 했던 기억도 새롭다. 그런 복숭아를 먹으면 미인이 된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혹해서, 눈을 질끈 감고 ‘벌레’를 얼마나 먹어댔던지 배가 복어처럼 부풀어 올랐던 그날 저녁이면 지도를 그리곤 했다. 아주 훗날, 두 오빠가 군에 가고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사고로 입원하는 일이 있었을 때,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오이를 시장에 내다판 일도 기억에서 살아난다. 서슬 퍼런 가시가 촘촘히 박힌 싱싱한 오이를 “사이소, 하나에 30원입니더!”하고 소리칠 때 나는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너무나 정성들여 기른 것들이 팔려나가는 것에 처녀농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말고는 없었다. 그것은 집에서 식구처럼 기르던 소와 막 태어난 강아지를 파는 애달픔과 다르지 않았다. 오이를 불티나게 팔았던 그날은 슬픈 도깨비 시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장에서 셈을 배웠고, 시장에서 정직했으며, 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지금도 우리 농민이 이런 마음으로 농산물을 재배하고 이런 마음으로 팔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나는 처녀농군이 아닌 평범한 소비자이지만 그들의 스토리를 안다, 고 믿는다. 그래서 난 시장을 보는 관점이 저자와는 좀 떨어져 있다. 그이가 세계 곳곳의 훌륭한 시장을 부각시키고 부러워할 때 우리 시장은 본의 아니게 작아지고 초라해졌다. 그들의 쿨하고 혁신적이며 독창적인 경영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다보니, 우리의 시장 경영은 그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별 볼일 없고 보수적이며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비춰졌다. 저자는 책에서 이웃 가게와 경쟁의식을 느끼지 않는 점을 칭찬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시장을 굳이 다른 나라 시장과 견줄 필요가 뭐 있겠는가? 굳이 견준다하더라도 우리 시장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만의 문화란 게 있지 않은가? 이 책이 우리 전통시장의 장점과 매력을 좀 더 부각시키고 힘을 실어준 후 약간의 팁을 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나는 몇 그램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센트 단위의 돈을 요구하는 서양 시장계산법에 서툴다. 주인장의 손저울의 투박하고 너그러운 계산법이 마음 편하다. 그 주인의 산술적 계산을 뛰어넘는 ‘덤’은 또 얼마나 정스러운가? 주인과 손님 사이의 ‘정’, 우리나라 사람도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없고, 세계의 어떤 언어로도 정확히 옮길 수 없다는 그 미묘하고 다감한 단어. ‘정’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네 전통 시장이다. 시장이 단지 물건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 나니라 정을 주고받는 곳이 아닐까, 나는 스스로 물어본다. 부전시장, 부산진시장, 자갈치 시장, 국제시장은 내가 아끼고 자주 이용하는 삶의 터전이다. 아직까지 먹는 일이 중요한 내게, 엥겔지수가 높은 우리 식구에게 그것은 어떤 박물관이나 미술관보다 더 훌륭한 문화의 장이며 살아있는 역사책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남포시장골목에서 쭈그려 앉아 그 분들이 내는 국시 한 그릇, 파전이나 빈대떡을 먹으며 6.25 피난시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자. 그 이야기 속에서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할머니와 손자가 만나고, 너와 내가 만난다. 그렇게 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전통이 된다. 

 

소비자로서 우리전통시장이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친절하되 호객행위를 하지 않고, 살 듯 살 듯 하다가 그냥 가는 사람에게 눈살 찌푸리지 않고, 물건을 교환하러 갔을 때도 처음 팔 때의 마음으로 기꺼이 바꿔주는 가게, 자기 집 식구들이 먹고 입는 것처럼 정직한 물건을 파는 그런 가게, 이익보다는 사람을 향하고 있는 가게. 이런 우리 시장의 모습은 화려한 컬러로 책을 만들어 광고하지 않아도 흑백사진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그렇게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좀은 덜 세련되어도 입에서 입을 타고 이어지리라. 부산의 전통시장들이 롱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에버래스팅하기를, ‘… 사람을 향하는 시장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좋아졌다.’는 살아남은 자의 기쁨을 노래하는 시장이 되기를. 

 

이제 나의 가을이 끝나려나보다.

Chapter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