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9371

책의 길에 투영된 내 삶의 길 - <격과 치>를 읽고 -

 

                                                                                                                                             김홍규

 

‘인간은 죽는 날까지 인간으로서의 예의와 품격을 지녀야 한다.’

 

마지막 책갈피를 넘기자, 시대의 명언처럼, 인류사의 격언처럼, 가슴에 한줄기 섬광을 긋고 지나가는 내 속엣 우러나오는 말씀. 그 진리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서점에서 조심스레 들춰본 ‘격과 치’였다.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나로서는 읽을수록 빠져들었는데, 그 이유는 지난 내 삶의 궤적이 한꺼번에 꿰뚫리는 느낌 때문이었다. 고전에서 가려낸 88편 모두가 어는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가르침이어서 나는 한편씩 읽을 때마다 내 삶과 연관을 지어 깊이 묻고 싶이 되새겨보았다.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 

‘입은 재앙의 문이오, 혀는 몸을 자르는 칼.’ 글귀를 읽는 순간, 가슴과 머리에 툭, 하는 동시충격이 왔다. 설화, 지금이야 달라졌지만 관용 없이 과격했던 젊은 시절, 정도가 심하든 가볍든 나로부터 설화의 화살을 받은 사람을 꼽자면 열손가락이 모자랄 듯하다. 그 중에는 고인이 된 사람도 있다. 그에게 심히 시달린 나로서는 병석에 찾아가 입바른 소리를 했지만, 중병을 앓고 있던 그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를 생각하니, 설령 입바른 말일망정 상황에 맞게 해야 한다는 따끔한 충고는, 뉘우침 없는 생을 살기 위해 자각해야 할 철리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우리사회에 생겨났다가 수습이 안 되는 설화사건은 또 얼마나 많은가. 위정자나 정치권, 각계지도층인사로부터 사흘이 멀다 하고 불거지고 터져나와 세상을 뒤흔들고 혼란에 빠뜨리는 설화는, 입은 재앙의 문이고 혀는 몸을 자르는 칼임을 깨닫지 못하므로 그렇게 난무하는 것 같다. 

 

花看半開 酒飮微醉 화간반개 주음미취 

‘꽃을 감사하자면 반쯤 피어있는 게 좋고, 술을 마시자면 얼큰한 정도가 좋다.’ 채근담에 나오는 글귀다. 채근담은 명나라 때의 책으로, 지금도 많이 읽히는 인간수양서가 아니던가. ‘정도에서 벗어나면 화를 부른다’는 의역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모든 화의 근원이 정도이탈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무릇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저지르는, 정도를 벗어난 언행으로 인해 인류는 재앙과 피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는 악의 회로를 돌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각종 참사, 가장 최근의 환풍구 추락참사는 ‘정도를 벗어난 화’의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도이탈과 매우 친근해져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당연시하는 풍소 속에 살고 있다. 가볍거나 무거운 돌출행위와 범법행위, 그 탈선에 매력을 느끼고, 탈선 후 뿌듯한 자만심과 희열로 몸을 떠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그것은 나만의 과잉된 추측일까? 내년이면 육십갑자를 거치는 나로서는 부끄럽지만 사소한 것까지 밝히자면, 정도이탈은 나모 도르게 내 일상에도 다가와 순간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어이없는 짓을 저지르게 한다. 도덕심이 무너진 건 아니지만 가끔 나는 어떤 사악에 조종당하는 사람처럼 무심코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니까. 얼마 전 나는 가벼운 산행길에서 아내의 만류를 무시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모과 열매를 딴 적이 있다. 모과나무가 좀 높은가. 그러나 아직은 체력에 문제가 없음을 과시하듯 나무에 올라갔고 아내는 빨리 내려오라고 발을 굴렀다. 아내가 보기엔 상당한 정도이탈이었을 것이다. 그날 딴 모과의 향은 진했다. 나는 뭐 어때? 향이 좋구만, 하며 내 행위에 흡족해했다. 다음날 오후에 공연관람자들의 환풍구참사소식을 접했다. 죽비를 맞은 것처럼 아픔을 동반한 깨달음이 왔다. 그들은 목숨을 잃었고 나는 멀쩡했지만, 정도이탈의 관점에서는 똑같은 안전불감증을 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스스로 자조한 안전불감증에 나도 당할 수 있으리라는 각성. 

 

爲鼠常留飯 憐蛾不點燈 위서상류반 연아부점들

‘집 주변에서 살아가는 쥐를 생각해서 주부는 늘 밥을 남겨놓은 채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고, 불나방을 불쌍히 여겨 선비는 어두워져도 등에 불을 켜지 않는다.’ 이 글귀도 채근담이 출처로, 한낱 미물까지 귀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진다. 가을일 깊어가는 날, 우리집에 풀벌레 한 마리가 들어와 밤이면 베란다 화초 틈에 숨어서 정겨운 소식을 들려주곤 했다. 그런 며칠 뒤, 한밤중에 다 큰딸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메뚜기인지 여치인지, 뭔가가 제 방에서 뛰어다닌다고 소란을 피운 것이다. 유달리 벌레를 무서워하는 딸이라 나는 벌레보다 딸의 소동에 더 정신이 없었다. 책상에서 침대로, 옷장으로 정신없이 날뛰는 벌레는 녹색의 작은 풀무치였다. 그러나 어쩌랴. 딸이 저토록 날뛰는 것을. 휴지로 겨우 잡아 감싼 나는 엉겁결에 화장실로 가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려버렸다. 그러자 딸의 원성이 시작되었다. 바퀴벌레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며칠 동안 얼마나 귀가 즐거웠느냐고, 그 어린 것이 얼마나 불쌍하냐고.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게 얼마 전 전남 해남 농가에서 농작물을 먹어치워 농가에 엄청 피해를 입힌 주범이라고 둘러대었다. 그리고 풀무치가 한 마리만 더 들어오길 고대했다. 살짝 잡아 보란 듯이 화단에 곱게 놓아주어야 딸로부터 나쁜 아빠, 벌레를 변기통에 버린 잔인한 아빠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일이 있고난 며칠 뒤였다. ‘격과 치’를 접한 나는, 아무리 딸의 소동에 갑자기 저지른 일이지만, 마음밑바닥에 미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 아닌가, 하는 ‘격 떨어진 인간’이라는 자아비판을 했다. 여린 생명을 두고두고 가여워하는 딸을 보며, 나는 내 딸이 한낱 미물까지 귀히 여기는 그 마음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기를 소원했다.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의롭지 않은 부귀는 탐내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경구다. 이처럼 현실에 딱 들어맞는 말씀이 또 있으랴. 의롭지 않은 부귀를 탐하다가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절정에 달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쇠고랑을 찬 사람들이 뉴스를 심심찮게 장식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인간사에서 이보다 더 치욕스런 재앙이 또 있을까. 다행히 나는 이 부분에는 떳떳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으며, 때로는 자기자신도 모르는 게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무엇보다 가슴 아픈 건, 알고 지내는 사람이 부당한 탐욕으로 매스컴에 오르는 건 물론, 스마트폰과 SNS 상에서 지탄을 받을 때이다. 한 오년 소식이 끊긴 절친했던 친구가 실물이 아닌 텔레비전 영상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거의 호흡이 멎는 듯했다. 그만큼 쇼크가 컸었다. 마치 그가 나를 배신한 것 같은 슬픔이 깊게 깔린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소식이 끊긴 지 오래 되어 하등의 이해관계가 없지만, 네가 어쩌면 그럴 수가 있느냐고 나는 텔레비전 속의 고개 떨군 그에게 마구 성토하고 싶었다. 모든 화의 근원이 의롭지 않은 부를 탐함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이 부정한 부의 유혹을 떨치는 것이니, 세상 모든 사람이 이를 목숨과 같은 철칙으로 여기면, 미물을 측은히 여기는 딸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다. 

 

‘격과 치’는 인생의 격을 높이고 현자의 치를 터득하는 책이라고 했던가. 

88편 모두가 주옥 같은 선인들의 지혜와 경험 어린 단편들이지만, 제1부의 ‘날마다 성장하는 삶’은 한편도 허술하게 읽고 싶지 않을 만큼 절실했다. 제2부의 ‘사람을 움직이는 기술’과 제3부 ‘이끌어가는 힘’은 비록 거대한 조직을 이끌지는 않더라도 가정과 작은 조직도 그 기본은 같으므로 읽고 큰 지혜를 얻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일을 도모하지 말라,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너그러움과 겸손함이다,인간관계에서 신의보다 중요한 게 무엇이랴, 잘못이 있으면 과감하게 인정하고 고려차, 높아지고 싶으면 남부터 높여라,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를 한자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었고, 남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실수에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부하의 사소한 실수에는 엄격할 때의 따끔한 지침인, 내 책임은 두텁게 남의 책임은 엷게 에는 나에게도 양심의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덕을 쌓는 데는 이로우니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라, 남이 잘못을 지적해주면 기뻐하라 에 조금 자숙하는 마음을 가졌다. 나의 맹점은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를 손톱만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으므로, 잘못을 지적하려 들면 기뻐하기는커녕 “뭐라카노?”라며 첫말부터 묵살해버렸던 전적이 많으므로.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진리.

이 책의 내용은 단지 그것뿐, 어쩌면 특별한 것도 없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당연한 말씀이며 평범한 진리가 마음속의 선을 키우고 양심과 도덕을 싹틔우고, 후회와 회한을 몰고 오며 비도덕과 비양심을 잠재우는 건 왜일까? 그만큼 우리는 평범한 진리를 간과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증명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은이 민경조님은 1000회 이상 논얼ㄹ 일독했다고 한다. 그만큼 성현에게 다가간 저자의 보물 같은 저서 한 권으로 내 삶 전체를 투영하게 되니, 이보다 더한 소득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나 자신을 가만히 응시한다. 

잘못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마는, 모순덩어리인 인간으로부터 조금이라는 벗어나기 위해, 평범한 진리가 가득 담긴 무형의 자산에 내 삶을 투영하리라고. 오늘의 자각이 또 흐지부지되고 내 안의 모순덩어리가 또 세력을 넓힌다면 틈틈이 꺼내 읽으며 책의 길에 내 삶의 길을 깊이 되물으리라고.

Chapter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