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3032

'누구가'에 관한 고갈되지 않는 상상 - <추방>을 읽고 -

                                                                                                                                              노진숙


「추방」은 전체주의가 에스토니아를 장악했던 시기부터 자본이 모든 이데올로기의 우위에 있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에스토니아로 환치될 수 있는 개인이, 특히 여성이 어떻게 재현되고 반복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근대의 강압적 분위기와 자본주의의 폭력성앞에 여성의 욕망과 몸이 소멸/소비되어가는 서사는 체제에 대한 고발이라기보다는 ‘반복’이라는 기제를 통해 오히려 구조를 긍정하고 강화시킬 위험이 있다. 하지만, 롤랑 바르트의 말대로 ‘독서란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는 것’이라면, 이야기의 밑면에 감추어진 것들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들을 ‘번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며, 독자의 몫이 아닐까 한다. ‘추방(purge)’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쫓겨지는 것을 말한다. 이때 제거되는 자는 ‘기존’ 체제를 위협한 자이거나, ‘기존’의 규범이 인정할 수 없는 위험한 자들이다. 즉 ‘추방(purge)’이라는 어휘 안에는 체제에 대한 불가침성이 이미 기입되어 있는 상태다. 이러한 무의식을 차치하더라도 독자는 이 책의 제목만 보고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쫓아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짐작대로 가족을 해체시킨 알리데와 보편적 여성의 삶에서 일탈한 창녀 자라는 ‘두 번째 누군가’이고, 그들을 경계하는 국가나 사회가 ‘첫 번째 누군가’인가. 과연 ‘첫 번째 누군가’와 ‘두 번째 누군가’는 어떻게 상상될 수 있을까. 둘 사이는 전복될 여지는 없을까. 또는 둘은 전혀 화해할 수 없는 관계일까. 


알리데의 언니 잉겔은 처음부터 ‘성모’로 표상된다, 그것도 ‘알리데’에 의해서. 이미 내면화된 남성의 시각으로 알리데는 잉겔을 쳐다본다. 많은 전래동화가 일러주듯이 ‘여성/공주’들은 잠들어 있으므로 세계와의 접촉을 갖지 못한다. 미몽의 상태로 남성들이 보기에 아름답거나 수난을 참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 탈출할 수 없는 ‘그녀’들은 용감한 남성들에 의해 구원받아야 하고, 남성의 입맞춤만이 여성을 깨어나게 한다는 전통적 성 역할극에 충실히 복무하는 여성이 잉겔이다. 올바른 행실만이 결혼이라는 보상을 가져다 준다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알리데는 동의하고, 잉겔이 바로 그러한 보상을 받은 여성이라고 생각한다.(잉겔은 ‘집안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척척 잘 해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반면 알리데는 잉겔로부터 핀잔을 듣는다) 그리고 질투한다.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한 몸에 받는 잉겔은 그 앞면에는 수동성이, 뒷면에는 환상이 작동하는 기표일 뿐이다 . 이것은 두 가지가 부재하기 때문인데 그 하나는 ‘주체’이다. 그녀는 가부장의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자신의 욕망을 표백한 자리에 남성의 욕망들로 채워넣고 남성의 일을 대리 집행한다. 남성이 원하는 것들이 자기행위의 앞면라는 점에서 그녀는 수동적이다. 남편(남성)을 지키기 위해 어린 딸 린다(여성)를 희생시킨 것은 여성 스스로가 여성의 적이 되도록 유도한 남성-법-국가로 이어지는 체제의 기만을 증명한 것이지만 ‘남성’이라는 창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잉겔은 그 법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부재하는 또 하나는 ‘몸’이다. 그녀는 ‘여기에 없다’. 한스가 밀실에서 숨어지내는 순간부터 잉겔은 ‘대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면서 환상이 작동한다. 한스의 일기속에서 모성신화에 근접한 여성으로 표현되는 것(잉겔이라면.....했을 텐데)은 잉겔이 남성의 임무를 대리 집행했을 뿐 아니라 몸의 부재에 따른 환상이 강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부재는 가부장이 원하는 여성상을 구현하는데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잉겔이 바로 그 표상인 것이다. 


반면, 알리데는 ‘성모’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잉겔과 린다가 강제이주 당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조함으로써, 언니의 가족을 해체하고 밀실에 숨어 지내는 형부를 소유하려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그것의 위험천만함을 알지만 가부장적 금기에 저항한다. “마르틴이 그녀에 대해 알기도 전에 알리데가 먼저 그를 선택”(175쪽)하였고 자신의 욕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전통적인 성 역할을 수행하여 자신을 공백(잠자기)으로 표기함으로써 마르틴을 속이지만 그녀는 여백이었거나 괄호안에 묶여져 유예되었던 적이 결코 없다. 매번 내면의 요청에 귀 기울였으며, 자기결정권을 자신에게로 돌려주었다. 한스를 가지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행동했으며 불이 난 건물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영원속으로 비약시킴으로써 스스로 소멸된다. 자라를 자본 또는 남성으로부터 구해내고 자신은 죽는다는 결말은 신파적인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 하지만 그것은 가부장에 백기를 든 모성신화의 재현이 아니라, 가부장이라는 틀 안에서는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여성의 좌표를 정할 수 없는 구조적 불가능성에 대한 항거이다. 마치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두 여성이 가부장에 대한 마지막 저항으로 벼랑으로 질주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소멸시킴으로써 자신을 지켜낸다. 하지만, 그 마지막 벼랑이 한스의 곁인 점은 델마와 루이스가 가부장을 조롱하며 돌진했던 추동력만큼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 쯤에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첫 번째 누군가’는 누구인가. ‘첫 번째’는 국가이고 ‘두 번째’는 알리데인가. 착한 여자는 남편을 지키려 했던 잉겔이고, 나쁜 여자는 언니의 남편을 욕망한 알리데인가. 그러한 표준적인 도식은 어디서 전승받은 것일까. 남성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할머니로부터,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여성에게서 여성에게로 전승된 이 가부장적 무의식은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할 전통일까. 입에서 입으로 또는 침묵에서 침묵으로 전승되어온 여성 안에 가로새겨진 남성 중심적 무의식은 누락해서는 안 될 ‘두번째 누군가’의 목록 중 하나라는 설정은 어떤가.


또 다른 ‘누군가’를 상상해보자. 체계에 충실히 복무하면 가장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남자’에 복무한 잉겔, ‘이념’에 복무한 마르틴, ‘민족’에 복무한 한스, ‘자신의 욕망’에 복무한 알리데. 자라의 미래는 행복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들 중 누가 행복해졌는가. 체제에 복무했거나 가부장을 부정했거나 자본의 흐름에 자신을 맡겼거나 모든 개인은 삭제당하고 최종 승자는 체제 그 자체이다. 체제는 자신에게 복무한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그들을 용해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이번 상상에서 ‘누군가’는 누구로 지목되고 있을까. 


국가라 명명해도 좋고 가부장이라 이름 지어도, 또는 자본이라 해도 상관없는, ‘누군가’를 걸러내는 수많은 ‘체’들, 그리고 걸러도 걸러도 끝내 찌꺼기로 남는 것들, 우리들의 무의식이 지목한 바로 그 ‘누군가’들...‘누군가’에 대한 상상을 거듭하다 보면 답지를 제출하는 일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국가-법-남성이라는 무의식의 감옥 안에서는 단답형으로 제출할 수밖에 없지만 무의식을 걷어내고 ‘누군가’를 재사유 해보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쫓아낸다”라는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가 해체되고 전복되는 경지가 열리지 않을까. 또는 가부장적 무의식으로 잉겔을 바라보면서도 가부장을 찢어내고자 했던 알리데의 분열처럼 문제지를 받은 이들의 거듭되는 분열은 정답을 끝없이 유보시키면서 ‘누군가’에 대한 상상을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첫 번째 누군가와 두 번째 누군가 사이의 벽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거나, 가지런하고 경계가 분명했던 두 가닥의 실이 엉키고 교차하여 서로 땋아지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상상을 거듭할수록 혼란스러워진다면, 경계가 희미해져서 답지를 제출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면, 오히려 그것이 「추방」의 다양한 서사를 뛰어넘는 또는 ‘추방’이라는 언어를 벗어나는 약간의 희망스런 조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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