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2706

당신의 안부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

 

                                                                                                                                              이지후

 

당신이 보고 싶다. 이미 사라졌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이 책을 읽은 후로 더 보고 싶은 사람. 그는 바로 그때의 나였던 옛사람이다. 내가 아프게 떠나온 나는 과거라는 타국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잊고 있던 그의 안부가 이제야 궁금하다. 하루키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 미처 이해할 경황도 없이 아픈 시간 속에 두고 온 나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그래서 왜 그때 그 참담함 속에서도 내가 죽어버리지 않고 지금껏 살아 왔는지도 조금은 분명해졌다. 쓰쿠루처럼, 나는 넘어서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넘어설 힘이 없었지만, 언젠가는 ‘넘어설 때도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애써 믿으며 시간을 견뎠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믿음이 어쩌면 내게는 생명 연장의 꿈이었을지도. 

 

누구에게나 최소한 두엇쯤은 잊지 못하는 상처가 있다. 나도 그러하다. 나에게 삶은 상처의 건축이었고 살아감은 붕괴의 재건이었다. 절망은 늘 관계 속에 있었고 관계는 자주 절망 속에 숨이 멎었다. 쓰쿠루도 그러했다. 그는 관계를 끔찍이 사랑했지만 관계는 그에게 끔찍한 상처로 남았다. 단 하나뿐인 소중한 관계로부터 당장에 떨어져 나가기를 종용받는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정이라면 그 치욕적인 결락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한순간에 지워진 자가 느낀 마음의 고통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지. 나는 쓰쿠루가 돼보려 굳이 애를 쓰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그의 마음이 되어 있는 나를 느꼈다. 무참함... 물론 내 느낌이 그의 것과 꼭 같은 것이라 단언할 자신은 없다. 단언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고통은 산술의 문제는 아닐 것이기에. 그러나 한없이 면벽했을 어떤 단절감과 극도의 고독감만은 엇비슷하다 해도 과장은 아닐 만큼 헤아려진다. 제대로 납득도 하지 못한 채, 강제 퇴거 명령을 이행해야 했던 어리둥절한 절연의 경험이 나에게도 아예 없지만은 않은 것이다. 

 

오래 전, 서로가 서로를 버린 그때의 당신과 나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끔씩, 나는 꿈에 비친 그들을 보기도 했었지만 애써 수소문해보려 한 적은 없다. 딱지로 내려앉은 어떤 상처를 부러 잡아 뜯는 일이 될 것 같아서였다. 내게 무지했던 사람에게는 나도 무심한 게 최선이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보니 그 무심함이 관계를 잊기 위한 최선이었는지는 몰라도 관계를 믿기 위한 최선은 아니었는지 모른단 생각이 든다. 이제 내 곁에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자주 내 현재적 관계에서 발굴되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났다 한들, 그 혹은 그녀에게 나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일이 배반이라는 역습의 기회를 주는 일이란 공포 아닌 공포가 나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듯하다. 과거의 망령이 아직 떠나지 않은 느낌... 기이하다. 수첩에서 지워진 이름들이 어떻게 지금 내 관계의 성장을 방해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루키는 많은 작품들을 통해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진지하게 천착해온 작가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 소설에서도 여전히 이 같은 질문은 유효해 보인다. 그러면서도 기존에 사용한 ‘모험’ 대신 ‘순례’라는 새로운 여정을 선택해 독창적인 하루키 월드의 건재함을 유감없이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이 그간의 작품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현실과 완전히 대치되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가 바로 자신의 내부에 스며있는 안 보이는 과거에 있다는 것일 테다. 과거는 현재에 내밀하게 간섭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끈질긴 그림자로 따라붙는다. 주인공 쓰쿠루는 십대 시절에 당한 절교의 상처를 잊(었다 생각하)고 이십 대에 새로운 대학 친구(하이다)와 관계를 시작하지만 그것을 오래 지속해내는 데는 실패한다. 삼십 대가 되어 만난 여자친구(사라)와도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지만 그 관계를 공고화시키는 일에는 역시나 어려움을 겪는다. 상처 입은 무의식 때문인 것이다. 눈 밝은 사라가 먼저 문제를 느끼고, 그에게 소중했던 기억을 더듬어 미해결 감정 사건을 찾아내도록 유도한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라의 모습과, 반복적인 꿈에서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는 쓰쿠루의 모습은 융의 무의식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 과거를 알아내고 치유할 수도 있다고 보았지만, 융은 과거 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예측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소설의 순례는 주인공의 과거 사건으로 회귀하는가 싶지만, 과거에서만 영원히 머물지 않고 현재로 복귀하는 새로운 여정, 그것도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진행 가능성(사라와의 연인 관계)까지를 포함하는데, 그래서 하루키가 융이 지적한 무의식 분석의 세계를 완성도 높은 이야기로 구현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해석이 될까. 

 

아카(적색), 아오(청색), 시로(백색), 구로(흑색)와 쓰쿠루(무색)는 한때 완벽한 케미스트리를 형성했던 단 하나의 견고한 시스템이었지만, 쓰쿠루를 잘라 낸 일을 시작으로 완전히 붕괴된다. 그리고 그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성장했는데, 다시 만난 아카와 아오는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확인된다. 적색과 청색이라는 선명한 색채감을 자랑했던 그들의 개성은 세월 속에서 혼탁하게, 혹은 평범하게 변해 있는 것이다. 순수한 예술 세계를 표상한 듯한 인물인 시로(백색) 역시 가장 근원적이고 고차원적 개성을 지녔음에도 살아남지 못하고 자멸했음이 전해진다. 쓰쿠루는 오랫동안 구로가 아닌 시로와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꿈을 자주 꾸었는데, 현실과 꿈은 같지 않았다. 이렇게 꿈과 현실이 반대의 모습일 때도 융의 무의식 분석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만들어낸다(作)는 창의성의 표상인 쓰쿠루와 존재 자체가 순수한 예술성의 표상인 시로의 결합은 창의적인 일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에겐 당연한 욕망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쓰쿠루가 꿈과는 다르게 시로를 잃게 된 것과 소중한 친구들을 잃게 되었던 것은 '作'이라는 일의 속성이 실은 깊은 상실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방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만난 친구들은 모두 예전의 모습에서 얼마간 변화해 있었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인 개성을 잃지 않았다고 읽히는 사람들은 오히려 평범에 가까웠던 구로(흑색)와 쓰쿠루(무색) 뿐이다. 신기하게도 이 두 사람에게선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모두 무언가를 만드는(作)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다. 구로가 그릇을, 쓰쿠루가 역사(驛舍)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은 게 단지 우연일까. 또한 둘 다 시로(순수함)를 사랑했지만 결국에는 그녀를 떠나 타국에서 살았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구로는 핀란드에, 쓰쿠루는 타 도시와 유년의 상처로부터 멀어진 다른 마음의 국가에 살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 구로는 가정을 이루었고 쓰쿠루는 애인을 만들었다. 붕괴된 과거를 딛고 현실을 재건하려 애쓴 것이다. 순수한 유년에 새겨진 치명적인 정신적 외상에 그저 함몰되어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무거워진 발을 스스로 한걸음씩 떼어내며 자신의 내부로 ‘순례’를 떠나는 자에게 삶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색을 다 칠하면 흑색(구로)이 되듯, 모든 색을 다 지우면 무색(쓰쿠루)이 된다. 검은 밤의 힘으로 견디든, 무색인 낮의 힘으로 견디든, 어쨌거나 삶은 한때의 치욕을 오롯이 다 견디는 자의 것이 아닐까. 

 

‘쓰쿠루’의 이름이 ‘만든다(作’)는 뜻인 것을 생각한다. 결핍의 힘이 창의성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전형적인 것이어서 조금 진부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반전 가능성인 것만은 분명하기에 나처럼 재능 없는 내핍의 인간에겐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개성을 조금씩은 가지고 태어난다. 적과 청, 백과 흑만이 아니라 연두, 보라, 회색 같은 상대적으로 흐릿한 색을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적지 않다. 한 인간은 제가 가진 개성의 농도와 밀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존재적 반향이 결정된다. 그러나 어떤 개성을 가진 사람도 이 사실 앞에서만큼은 동일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매일 매일 아무 색도 칠해지지 않은 빈 스케치북 같은 시간이 공평하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날마다 돌아오는 하루치의 삶. 이 하루는 완벽하게 비어 있는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다. 이 현재적이고도 미래적인 시간을 투명(쓰쿠루)한 빛의 힘으로 만들어(作) 갈지, 검은(구로) 어둠의 힘으로 만들어(作) 갈지는 자신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안타깝게도 인간이 가진 자유 의지의 본성은 연약하기만 하다. 과거의 암울했던 기억에 붙들려 우리는 자꾸만 넘어진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그냥 드러누워 나도 모르겠다, 잠을 청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현실 도피에 기대어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용서 없이 흐르고 있다. 하루키는 넘어진 바로 그 현실의 자리에서 상처 입은 기억을 짚고 다시 일어날 힘을 내어보라고 이야기한다. 순례를 떠나고 완성해가야 하는 사람이 누구도 아닌 넘어져 있는 당신이 아니냐고 질문을 건넨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 삶의 주행을 그만두고 주저앉고 싶은 지친 마라토너에게 건네는 한 병의 생수가 된다. 이 응원이 전에 없이 다정하게 느껴지는 건 과거의 상처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함을 삶에서 알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와 상처를 입힌 사람들과 상처가 난 그 시간은 그때의 나를 고스란히 되비추고 있는 거울이다. 나는 거울을 그냥 깨뜨려 버리고 싶지만, 그 거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이 누구였는지 확인할 길도 사라진다. 그래서 과거의 자신을 향한 세심한 순례는 나의 현존을 세세히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아픈 '순례'의 형식이야말로 아프지 않은 인생의 의미를 완성해가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부러 방문함으로써 현재의 나를 만들어가며((作) 미래의 내 모습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생각하면 삶이 문득 신비롭다. 이 은밀한 순례의 끝에서 쓰쿠루는 다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새 그에게 투영되어 있는 나 자신을 읽는다. 그의 순례를 쫒다 보니 내가 잊고 있던 시간의 진실이 다시금 궁금하다. 나는 책을 덮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한다. 나였던 나에게로 돌아가려고. 나다운 나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나였던 그에게 물어보려 한다. 아직 내 속에 살고 있는 상처 입은 당신은 안녕한가. 오래 전에 헤어진 당신의 안부가 꿈결에 바람결에 실려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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