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고통을 받아들인 사랑의 무게 -송동선 님의 '아버지니까'를 읽고 -
이은미
당신의 굽은 등을 기억한다. 새벽 5시면 마당에 쭈그려 앉아 찬물에 세수를 하던 당신의 그 굽은 등을 잊지 못한다. 함박눈이 내리던 1월의 어느 날에도 당신은 같은 모습으로 앉아 발갛게 언 손으로 세수를 하고 있었다. 오래 입어 헤진 회색 내복 위로 당신의 굽은 등은 또 다시 고단한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식들을 위해 삶의 고단쯤은 어깨에 쌓인 함박눈처럼 톡톡 털어내 버리던 당신의 그 사랑을 이해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신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가난과 고질적인 신경통으로 당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를, 나는 이해하기보다 당신의 탓으로 돌리기 바빴다. 그런 내게 <아버지니까>는 때늦은 후회처럼 가슴 먹먹하게 다가왔다. ‘선물 받았는데 우리 아빠 생각나더라, 언니도 읽어봐’라며 책을 건네던 동생의 손길은 무심한 듯 단호했다. 동생에게도 내게도 아버지의 자리는 그리움과 상처와 애증이 얽혀 뭐라 단언되지 않는 모호함으로 남았다.
동생에게 책을 받고 쉬이 열지 못했던 책장을 이제야 마주했다. 읽고자 하는 욕구보다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강하게 나를 지배하고 있어 그동안은 쉽사리 책을 펼치지 못했다. <아버지니까>라는 제목이 주는 압박감이 통증처럼 지나간 내 시간들을 누르고 있는 듯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전국적으로 가을비가 온다고 했는데 잔뜩 흐리기만 한 오늘, 모처럼 시간이 나 책꽂이에 모로 누운 책을 꺼냈다. 책을 권한 후 다 읽었냐고 몇 번쯤 물어왔던 동생이 이젠 더 이상 내 독서 여부를 묻지 않을만큼 시간이 흘러 있었다. 가볍게, 깃털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내자고 다짐 아닌 다짐을 하며 책을 꺼냈다.
<아버지니까>는 르포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버지인 자신의 이야기를 자전적 입장에서 담담히 술회하고 있지만, 논픽션이 주는 현실감에 결코 가볍게 활자를 넘길 수가 없다. 가볍게 읽어내 버리자던 내 다짐은 책에 담긴 진심에 어느새 무릎을 꿇고 내동댕이쳐졌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주는 마음 불편함에 애써 마음을 주려하지 않았는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더 마음이 가고 애틋해 지는 감정을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의 삶이 그렇듯 저자의 삶도 결코 녹록치 않다. 공무원에서 기자, 논술위원까지…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부러운 직업과 사회적 위치를 갖췄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의 삶도 보장된 것은 없었다. 명예퇴직을 하고 아내의 사업실패로 해체 위기에 놓인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는 더 강해져야만 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정신적, 육체적 고통마저 감내하는 그를 통해 나는 내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 늘 새벽같이 일을 나가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도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나빠지기만 하던 살림살이. 하루 벌어 하루 겨우 사는 형편이라 하루도 일을 쉴 수 없었던 아버지의 그 지친 어깨를 나는 한 번도 다정하게 어루만지지 못했다. 그땐 갖는 일보다 포기하고 외면하는 일이 더 많은 우리 집 형편을 인정하는 일이 벅차기만 했다. 그 힘든 시절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가족이고, 아버지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철이 없었고 어렸다.
‘아버지는 한 가정의 역사다. 참으로 고단하고 외로운 길이다.’라는 작가의 고백은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었고, 감히 우러러 보기도 힘든 절대적 권위의 상징이었다면 현대의 아버지는 더 이상 존경이나 절대적 권위를 구가하는 권력자가 아니다. 서글프게도 자식들에 대한 양육의 의무만 있을 뿐,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이나 존경도 보장되지 않는다. 사회가 변했고, 어느새 아버지의 역할도 변했다. 친구 같은 아버지, 자녀와 잘 놀아주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라고 여겨지지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자녀에게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친구 같은 아버지이되, 자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사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아버지. 그래서 우리 시대의 아버지는 더욱 설 자리가 없어지는지도 모른다. 의무만 있고 그에 따른 보상은 없는 자리란 누구에게나 쓸쓸하고 벅차다.
저자는 가족을 위해 막노동부터 바다에 나가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온갖 직업을 거치며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직업은 절집의 처사일… 소위 인텔리에 속했던 그가, 우리 사회 통념에서 밑바닥의 직업이라 터부시하는 그런 일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그가 만약 한 여자의 남편이 아니었다면, 세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그런 일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속단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타인에게 존경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될 법한 직업에서 온갖 궂은일은 다하지만 편견의 벽에 누구나가 꺼려하는 직업을 선택하기까지 그의 고민은 깊었을 것이다. 자식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좀 더 편한 삶과 인정받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게 그는 어려운 선택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시선이나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가족들의 행복과 가정의 안정이었으니. 모정만한 부정은 없다지만 그의 부정은 분명 모정을 뛰어 넘는 감동이 있다.
아직도 자식을 위해 힘든 삶을 즐겁게 살아내고 있을 저자에게 조용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더불어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큰 그늘이 되어 우리 가족을 지켜준 아버지에게도. 한껏 독 오른 반항기로 아버지에게 맞서기만 했던 내 사춘기를 아버지는 단지 아버지라는 그 이유만으로 참아내고 보듬어 주셨다. 그것이 사춘기 소녀에 대한 이해가 아닌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걸 나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오후가 되면서 빗방울이 돋기 시작했다. 잔뜩 흐리기만 하던 하늘이 기다렸다는 듯 비를 흩뿌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날씨에도 저자는,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가족을 위해 고단한 하루를 이겨내고 있을 것이다.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묵묵히 버텨내고 있는 아버지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너무 늦게 아버지를 이해한 철없는 자식을 대표해서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응원한다. 아버지들이 인내한 하루하루가 그들의 아이들에게는 인생의 수많은 흐린 날을 지탱할 수 있는 큰 힘이 될 것이다.
하늘은 잔뜩 흐리지만 내 마음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이런 날, 아버지를 그리워할 수 있는 좋은 책 한 권을 만나 더 없이 기쁘다.
Chapter
- 제23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당선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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