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우리들의 아름다운 '누이' - 김정현 장편소설 '누이'를 읽고 -
박옥현
30여 년 전의 일이다. 산업체부설 야간 여자실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한 적이 있다. 전교생이 여학생인 이들은 주경야독의 산업 역군들이었다. 그 시대말로는 ‘역군’이라고 치켜(?) 세웠지만, 사람들은 공순이라며 얕보았고, 또 그들 스스로도 단발머리를 하고 정규 학교에 다니는 또래들의 우월감 앞에 야코가 죽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가난과 무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내일을 꿈꿀 수 있었고, 일찍이 타고르 시인이 읊었듯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연간 무역액 1조 달러의 동방의 등불이 된 것은, 오로지 설과 추석 연휴만 쉬고 1년 내내 일한 ‘우리들의 누이’ 여공들이 디딤돌이 되어 이룬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형제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로움도 그 때 큰딸과 맏딸인 누이들의 희생과 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상급 학교에 진학 하자니 장남 때문에 큰딸이 양보해야 했고,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자니 맏딸이 공장으로 돈 벌러 가야 했다. 그래서인지 당시에는 야간 학교가 꽤 많았다. 천막 학교도 있었고 사내(社內)에 야학을 둔 회사도 많았다. 말이 학교지 학력 인정이 안됐다. 교사들도 임용 순위고사 준비 중이거나, 대학에 재학 중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의문을 품으면 학력 인정이 된다며 적당히 얼버무리곤 했다. 그 학교 근무 때, 시골 중학교를 돌면서 학생들을 많이 판촉(?)해 왔다. 회사에서는 여공들이 많이 필요했고, 각 가정에서도 소위 ‘돈 벌면서 공부 할 수 있다’ 하니, 아직 품속에서 키워야 할 나이인데도, 어린 자식들을 냉정하게 도회지로 내 보냈다.
한 번은, 하늘에 짙은 회색 구름이 낀, 크리스마스가 코앞인 어느 날, 거창에 있는 모 중학교에 졸업을 앞 둔 여학생들을 데리러 갔었다. 전세 버스가 학교로 들어서자 회색 하늘은 운동장과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내려 와 있었다.
20여명을 버스에 태우는데 친구들도 따라 올라, 떠나는 친구에게 카드를 주면서 서로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배웅 나온 전교생들은 차 주위에 몰려 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버스에 오르는 순간, 울음 섞인 목소리 하나가 들려 왔다.
“아저씨, 언니들 데리고 가지 마세요.”
나는 그 때 움찔 놀라 뒤돌아보며 목례를 했다. 차가 교문을 빠져 나오자 눈을 담은 구름 자루가 펑! 하고 터졌다. 차 안은 물론이고, 친구와 후배들이 있는 운동장은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다. 장남 때문에, 남동생 때문에 모든 걸 양보하고 떠나는 것이었다.
시골 눈보라를 헤치며 달려온 차는 어둑해서야 부산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를 앞 둔 도시는 들떠 있었지만, 어린 여학생들은 잔뜩 겁에 질리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차창 밖 도시의 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업학교에 도착하자 시설이 열약한 건물에서는 라면 냄새가 확! 풍겨 왔다. 라면으로 저녁밥을 때운 그들은 바로, 학교 측과 약속 된 회사의 기숙사로 갔다. 다른 지역에서 도착한 차에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학생도 몇몇 보였다. 이들은 개학 전까지 돈을 벌어야 했고, 개학하면 본격적인 주경야독을 해야 했다. 개학이 가까워 오자, 학교 전달 사항 때문에 회사 기숙사를 방문했다. 아직도 찬바람은 기세가 등등했다. 곧 입학할 학생들을 집합시켰는데,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집에 보내 달라고 울고불고 야단이었다.
“반찬이 입에 맞지 않아요.”
“잠자리가 불편해요.”
“3교대가 힘들어요.”
아직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할 나이이니, 한두 달 사이 냉정한 사회를 알았으면 얼마나 알았을까? 겨우 마음을 다독여 다시 숙소로 돌려보냈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그 후 그들은 기계 앞에서 손을 찢겨가며 기술을 익히고, 잔업 하는 날에는 미싱 앞에서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쫓느라 다리를 꼬집었다. 미싱은 사계절 내내 고장도 안 나고 어찌나 잘 돌아갔는지… 그렇게 몇 년이 지나고 숙련공이 되자, 거처를 기숙사에서 자취방으로 옮겼고, 시골의 동생들을 도시로 불러 들여 계속 공부를 시켰다. 그 때 누이들은 공부하는 남동생이 또 다른 자신이었다. 동생들은 누이를 ‘공순이’라며 철없이 놀렸지만 말이다.
나도 회사에 다니던 손위 둘째 누이의 강력한 권유로 대학에 가게 되었는데, 동생인 내가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했다. 그리고 누이로부터 다달이 부쳐 오는 얼마간의 돈은, 돈 나올 곳이 라고는 없는 시골에 단비와도 같았다. 10살 위인 큰 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서 여공과 시내버스 안내양을 하며 가족의 발판이 되었지만, 20살의 어린 나이에 시집을 잘못 가 큰 낭패를 보았다. 칠푼이 매형을 만난 것이다. 처가에 칼을 뒷주머니에 차고 와서는 행패를 부리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야, 이 여자야” 하면서 장모의 뺨을 찰박찰박 올리는 날도 수없이 많았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야 그런 행패가 끝났으니, 만 30년간 우리 가족을 괴롭힌 것이다. 어렸을 적 내 누이는 장사나간 어머니 대신이었다. 이제는 늙어 버린 누이를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결국 그 시대는, 어느 집이든 딸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부모와 장남 그리고 남동생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서 살아 온 것이다. 이 소설의 ‘누이’ 역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억세게 살아간다. 주인공 영순은 5남매의 장녀다. 자신은 초등학교를 마친 것으로 감지덕지하지만, 남동생은 대학에 보내 뒷바라지했다. 미싱공 ‘시다’(보조)로 하루 스무 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하며 동생에게는 용돈조차 거르지 않았다. 그렇게 했는데도 장성한 동생은 염치도 유분수지 누이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요청 한다. 모른 체 할 수 없는 예순의 누이는, 목욕탕에서 때밀이로 번 돈을 몽땅 동생에게 준다.
지금 우리의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기초를 놓은 그 시대의 공순이 공돌이들이 바로 지금 50~60대이다. 이제 이들은 20~30대의 장성한 자녀들을 두고 있는데, 그 자녀들이 분노와 감정 폭발을 주로 엄마에게 투사한다. 그런데다, 어른이 되었지만 정신을 못 차린 동생들이 아직도 누이에게 손을 벌린다. 또한 조카들을 대책도 없이 맡겨 버리기는 황당한 일도 있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가정은 맏이 누이가 부모 노릇까지 해야 한다. 우리 누이들은 울고 싶을 때, 울음을 토해 낼 상대도 장소도 없었는데 말이다. 요즘은 피자와 햄버거를 찾으며 입맛을 쉽게 바꿔 버리지만, 그 시대 우리의 누이들은 배고픈 퇴근 무렵의 라면 한 그릇은 사치스런 일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어느 대학을 가느냐로 고민 하지만, 누이들은 배움의 기회마저 송두리째 양보 해 버린 것이다. 겉으로야 이 책의 주인공처럼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감사하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가방 끈 짧음에 대한 아쉬움과 서러움이 왜 없을까.
그래서 수 년 전, 금사 공단 근처 있는 어느 여고 교장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아 ‘어머니 중학교’ 과정을 만들었더니, 정원이 일찌감치 차버렸다. 마산에서도 울산에서도 왔는데, 듣기로는 그들이 먼 곳에서도 결석 한 번 안했다고 한다. 반신반의 했던 일이 대성공을 거두자, 전문계고에서는 너도나도 ‘성인 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희생만 할 줄 아는 누이, 언제나 오랜 친구 같은 사랑스런 누이라고 노래했지만, 누이들의 속 깊은 마음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누이’들에게 음으로 양으로 많은 빚을 졌다. 갚지 않아도 원망 할 누이는 없다. 어쩌면 누이들은 ‘딸’과 ‘맏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희생과 양보만 해야 하는 순교자적인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이 시대 누이들은 효자효부의 마지막 모델이며, 남편들은 10여 년 전부터 유행한 구조조정의 1순위이니 마음이 좀 무겁겠는가. 그리고 자녀들과 동생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남편의 퇴직금까지 내 놓아야 할 판이니, 누이들의 가족을 위한 희생과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의 주인공 영순은 끝내 큰 병을 얻어 쓰러진다. 이제 우리는, 누이도 자신을 위한 준비를 하도록 애를 그만 먹이고 놓아 주어야 할 것이다. 국화의 계절이다. 어느 시인은 국화를 ‘역경을 이겨낸 원숙한 중년의 아름다운 누님’에 비유했다. 오늘 저녁, 우리들의 아름다운 ‘누이’에게 노란 꽃이 활짝 핀 국화 화분 하나 선물 해 보면 어떨까.(*)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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