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아버지의 힐링캠프 - '아버지니까'를 읽고
김유진
“아버지는 왜 외로운가?”
“아버지는 왜 일해야 하는가?”
“아버지는 왜 아프지 말아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아버지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버지니까……”
울리지 않는 전화기에 외롭고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처럼 회사 가기 싫을 때도 있는 아버지이다. 그러나 두 밤 정도만 앓고 나면 다 낫는 환절기 감기마저도 아버지만큼은 걸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아버지가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만큼 철이 든 후에는 아버지의 외로움을 알아차릴 법도 한데 우리는 외면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릴 적 느꼈던 바다같이 넓은 어깨와 산만큼 컸던 아버지를 기억이 아닌 현실에 두고 싶은 어리광일까. 우리는 각자의 그럴듯한 이유로 아버지의 외로움과 아픔 앞에 눈을 감아버렸다. 아버지의 파산신고. 특별히 부유했던 적도 없었고 악덕업주마냥 돈 욕심을 부려본 적도 없는데 집은 가난했고 그 가난은 목을 죄어오는 빚더미가 되어 한 가정을 파산의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아버지는 파산신고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가정을 지키고자 했다. 무너진 신용으로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없고 눈덩이 굴리듯 불어나는 빚으로는 가망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파산신고를 하려면 카드, 통장, 주택 등과 관련한 모든 증빙서류가 필요하다. 그리고 대부분 변호사 측에 돈을 주고 대필을 한다는 법원에 선처를 바라는 글을 첨부해야 하는데 이 내용은 어떻게 사업이 망했으며, 어쩌다가 빚을 이렇게나 많이 지게 되었는지 등을 처량하게 느껴질 만큼 써야 한다. 아버지가 파산신고를 할 당시에는 말 그대로 파산의 상태였기 때문에 대필료 마저 너무나 큰 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필료 만큼은 빚을 지지 않을 수 있었다. 가난이 아버지가 준 유일한 재산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분노에 눈물을 더하여 그 글을 쓴 아버지의 딸인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보다 아버지가 밉다고 느끼며 빚보다 아버지가 더 무섭다고 느끼며 그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글은 변호사가 도대체 어디서 대필해 온 거냐며, 자신이 이 일을 한 이래로 읽은 글 중에 가장 잘 썼다는 칭찬을 받으며 한 자의 수정도 없이 법원으로 들어갔다. 그 글 덕이었을까 아니면 도저히 회복 가능성이 없는 바닥에 엎드린 신용 덕분이었을까. 우리 집은 파산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외면하는 딸이 되었다.
특별히 배운 기술도 내놓을 만한 학벌도 없던 아버지는 언니와 내가 학교를 가고 엄마가 직장에 가서 조용한 빈 집을 지키며 점심을 라면 하나로 허기를 달랬다. 퇴근 후 돌아 온 어머니가 라면 봉지를 보고 또 밥 안 잡수셨다는 잔소리를 할 게 뻔한데도, 라면을 먹을 거면 계란 하나 풀어 넣으라는 지겨운 레퍼토리를 들을 게 뻔한데도 계란은 한사코 넣지 않는 아버지. 재방송 예능프로가 재잘대는 텔레비전 앞에 빈 웃음소리를 내며 어젯밤 편 이불에 그대로 누워 아내와 자식들이 돌아 오는 저녁을 기다리는 아버지. 메말라가는 하루에도 어제일자 벼룩시장 구인광고에 허탕을 친 아버지는 내일 새벽 지하철역 앞에 벼룩시장 신문을 구하러 갈 것을 다짐했다. 구직에서도 파산한 아버지는 이삿짐 옮기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엔 변변치 않은 직장일 게 뻔했지만 파산한 가정을 위해 먹여 살릴 자식을 위해 어깨가 부서져라 일을 했다. 매일 낮에 홀로 집 안에서 끓여 먹는 라면을 먹는 것보다 먼지 묻은 손으로 간단히 때우는 한 끼로 인해 아버지의 마음은 편안했다. 일이 없는 날 즉 누군가가 이사를 가지 않는 날이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또 어제 편 이불에 누워 개그프로그램을 보았지만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 희망은 곧 상처입고 더럽혀졌다. 바로 나 때문이다. 파산의 선처를 베푼 것이 나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던 그 철없던 시절의 나는 아버지에게서 그 희망을 빼앗았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미운 딸내미를 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집 안에 파스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도 공부한다는 이유로 굳게 문을 닫고 방 안에 박혀있는 막내딸을 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투정의 시간과 침묵의 시간은 꽤 오래 흘렀다. 그러다 나는 고3 수험생활을 마치고 대학입학과 재수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할 당시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아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보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축의금 넣는 편지봉투에 A4용지 위에 쓴 아버지의 편지.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쓰다가도 중간중간 휘갈겨 쓴 아버지의 낯설지만 낯익은 글씨체의 편지.
“막내딸아. 이름을 불러본 지가 오래 전 일이라 이름을 부르는 것마저 어렵구나. 네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이제는 대학생이 되는 숙녀의 나이가 되었구나. 아빠가 이렇게 처음 너에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네가 대학입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빠로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다. 엄마와 상의해서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1년 더 공부하는 것이 결코 남들보다 뒤처지는 일이 아니니 너의 꿈을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렇게 편지를 선택한 이유는 글로 상처받은 너에게 글로 사과하고 싶어서다. 우리집이 많이 어려웠을 때 아빠는 너에게 해서는 안 될 부탁을 했다. 처음엔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딸인 네가 아빠의 심정을 우리집 사정을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했다. 이 일이 너에게 그렇게 큰 상처가 될 지 그때는 차마 몰랐단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구나. 책도 많이 읽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는 우리 딸. 아빠는 그렇지 못해서 이 아빠의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우리 딸이라면 아빠의 마음을 읽을 거라 믿는다. 사랑한다.” 아버지니까 하고 싶었던 말을 그 동안 묵묵히 참아왔고 아버지니까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도 더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게 분명했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나는 그제서야 그 글을 나에게 부탁할 때의 아버지의 마음도 무거운 이삿짐 탓에 구겨진 종이짝 같았던 아버지의 어깨도 볼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버리며 외면했던 그 나날들의 철없던 나는 이제서야 힘들었던 아버지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던 끝이 안 보이던 거리와 마음의 벽 또한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색했지만 함께 식사도 하고 주말 저녁 개그프로그램도 함께 봤다.
유난히도 매서웠던 겨울을 보내고 불쑥 찾아 온 봄바람은 나를 더욱 성숙하게 했다. 나의 아픔만이 아닌 아버지의 아픔도 보듬을 수 있는 철든 나를 마주할 수 있는 봄이었다. 때로는 그 누구보다 마음 약한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도,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을 때 뜨거운 눈물을 속으로 삼키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럴 때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아버지라는 것 역시. 각박한 세상에 치이는 아버지의 삶을 친구와는 까르르 웃으며 통화하는 딸내미를 묵묵히 바라보는 아버지의 삶. 그리고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사는 아버지의 삶…… 이 메마른 삶을 안아주는 손길이 필요하다.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정말 힐링캠프가 있다면 그 곳에 제일 먼저 가야 할 사람은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아버지를 위한 힐링캠프는 없을까?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다. 아버지라서 당연히 고단한 삶을 택한 아버지를 위한 힐링은 바로 우리들이다. 오늘 시험을 망쳤다든지 친구 누구의 생일파티를 하고 기숙사에 들어가는 길이라든지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하는 것. 때론 쑥스럽기도 하겠지만 아버지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에겐 곧 힐링이다. 그리고 ‘아버지니까’라는 말이 아픔이 아니라 사랑인 것 역시 힐링이다.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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