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6865

봄날은 간다 - <울 준비는 되어 있다>를 읽고

광주진흥고 장힘찬

 

  

 

솔직하게 말해서 더 이상 가을을 잡고 서 있을 기운이 없다. 가을은 이미 내 곁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연인이 내게서 멀어져 간다는 것. 손을 잡을 수 없고, 허리를 휘감아 안을 수 도 없는 것. 어디 그뿐일까? 마주 볼 수도 없는 엇갈린 시선에 어깨를 늘어트리고 길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도. 

 

나의 사랑과 에쿠니 가오리의 사랑은 마치 헤어진 연인들처럼 머뭇거리기 일쑤다. 그녀의 솔직한 사랑이 내 속앓이 사랑과는 동떨어져 있는 이유는 아닐까. 나는 사랑하지만 결혼 할 수 없는 그에게 <날 정부로 삼아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고, 또 그녀처럼 지루하지만 평온한 결혼생활 중에 수시로 옛 애인을 생각하거나, 툭 던지듯 <우리 이혼해>라고 아무 일 없는 듯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가오리의 사랑방식이 진짜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벌써 가오리의 소설은 세 권 째다. 그 세권 째 소설인 <울 준비는 되어있다>. 제목이 참 마음에 들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가을일 것 같지만 가을에서 한참 더 깊숙이 들어간 늦가을, 혹은 초겨울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말라버린 낙엽을 밟으면서 혹은 결코 하얗지 않은 밤바다의 바람을 맞으며 두꺼운 숄을 두른 가오리. 누군가를 생각한다. 옛 애인일까, 화해하지 못한 친구들? 혹시 어렸을 때 이혼 해 버린 두 부모를? 

 

여러 환상의 추억들을 가오리는 꽁꽁 얼려 몇 편의 글로 녹여냈다. 차갑지만 온기가 풍긴다. 그 뜨거웠던 사랑들의 흔적들은 도통 말라버렸을까? 알 수 없는 기운이 되어 하늘로 증발해 버렸을까. 가벼운 바람에도 날리는 구멍 뚫린 낙엽이 되었을 것이다. 햇빛이 구멍을 비출 때까지 아마 가오리의 추억은 바스락 바스락 소리를 내며 겨울을 기다리겠지. 열두 개의 짤막한 소설들 중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아득한 상처로 가득 차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도 봄날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사랑이든, 다른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분홍빛 벚꽃들처럼 화려하게 꽃비를 내렸을 추억. 땅거미가 내리고 온 세상이 붉게도 물들 때면 입맞춤으로 시작된 열병은 두 몸을 껴안은 욕정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첫사랑이므로 두근거렸을 것이다.

 

가오리에게 그런 추억은 엄청난 존재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나 다른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문득 옛 추억을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항상 그 추억을 현실 속에 담가둔 채 글의 마무리를 본다는 것. 그 현실이 추억을 간직할 것인지, 놓아버릴 것인지, 혹은 쫓아 갈 것인지. 옅게 담가 놓은 가오리의 추억들을 우리는 하나씩 혹은 두 세 개씩 꺼내 맛본다. 그 맛은 나로 하여금 깊은 상상에 빠지게 만든다. 

 

사랑의 추억과 현실의 안주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나는 새롭게 나를 찾는다. 실제로 소망이나 열망 같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향한 현실과의 갈등에서는 항상 선택도 아닌 그렇다고 포기도 아닌 마치 바람처럼 떠돌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열병이 지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너무 미지근해 진 소설속 주인공들은 마지막에 한숨 섞이거나, 더 이상 고민하기 싫다는 말투로 아주 쉬운 말 몇 마디씩을 툭 던진다. 장난 섞인 말투로 상대방에게 질문을 하기도 한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 상대가 되어 대답해 준다.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할지.>그리고는 다시 말한다.

 

“우리 한때는 서로 사랑했었는데, 참 이상하지. 이제 아무 느낌이 없어... 당신 그거 어떻게 생각해?” 

 

벚꽃 날리는 봄날. 

소설의 봄날은 이미 지났다. 

사랑, 혹은 그 무언가로 향하는 가오리의 행로는 

긴 여름을 지나 가을로 왔다. 

어떤 형태로든지 나타나진 않지만 

가오리는 무언가를 쌓고 무너트리며 

독자들의 가슴에 원형의 기둥을 두 세 개 씩 세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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