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5596

못 가본 나의 길

 

                                                                                                  김요섭

 

어릴 적부터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 있었다.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그저 언젠가 쓸 것이고 어느 순간 작가가 되어있을 거라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밥벌이가 되지 않고서는 그것 자체가 사치일 뿐이었다.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감추었던 꿈은 서른이 넘어, 직업의 안정을 찾은 후에 보이기 시작했다. 교직생활 5년이 넘으면서 권태감 속에 돌파구를 찾던 나는 잊고 있었던 기억속의 손때 뭍은 서랍을 다시 열어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보다 책을 좀 많이 읽었다는 자부심만으로 좋은 글을 써보겠다고 덤비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막연한 소망의 실체가 드러나며 작가로서 재능이 없는 것 같은 두려움에 마음은 타들어갔다. 더 많은 책을 읽어갈수록 쓸 수 없는 마음은 더욱 무너져 내렸다. 열정에 비해 턱없는 재능을 탓하며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르처럼 늦은 밤 지쳐 잠들기도 했다. 이대로 꿈을 꺾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위기의 순간에 ‘못 가본 길에 대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이를 만났다.

 

‘책으로 젊은 피를 수혈할 수도 있다고 믿는 한 나는 늙지 않을 것이다.’ 활자중독이라고 자신이 고백 할 정도로 많은 책을 읽은 자신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짧은 문장이었다. 그의 글은 평생토록 책을 놓지 않고 문학의 자양분을 얻으며 고통 중에도 끊임없이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삶이었다. 얼마 되지 않은 독서력을 가지고 막무가내로 작가를 모방하려 했던 치기를 반성 했다. 한편으로 ‘이렇게 평생을 다독과 다작으로 문단에서 인정받고, 대중에게 사랑받은 대작가에서 못 가본 길에 대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굳이 말년에 아쉬움의 에세이를 남긴 것은 어떤 연유에서 였을까?’ 궁금했다. ‘내가 당초에 되고 싶었던 건 소설가가 아니었다. 다만 대학에 가서 학문을 하고 싶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무엇이 되는 건 그 다음 문제였다. 당신만 해도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었을 뿐 졸업하고 뭐가 되는 직업인을 양성하는 데가 아니었다.’ 여자가 대학가서 공부한다는 것이 힘들었던 그 시절 그녀는 서울대에 진학했다.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으로 진정한 학문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작가의 가지 않은 아름다운 오솔길은 바로 순수한 학자의 길이었던 것이다. 비교하기에 가당찮은 일인지 모르겠으나, 교사로서 작가를 희망하는 나와는 어쩌면 반대의 방향에서 서로의 꿈에 대해 조금씩 잊어버리게 하는 ‘레테의 강물’을 마시며 지금의 모습까지 온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어찌되었건 현실의 ‘레테의 강’은 6.25 전쟁으로 나타났다. 그것으로 인해 꿈과의 단절을, 결혼 후 안락한 삶의 나락을 이겨내기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문학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청준의 소설에도 나오는 전깃불 뒤의 어둠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다짜고짜 우리 얼굴에 불빛을 쏘아대며 빨갱이인지 반동인지를 묻는 오만한 심문자,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던 시기를 거치면서 잃어버린 내 정체성, 고달픈 소녀 가장을 거쳐서 안착한 사회의 외풍을 막아줄 남자와의 무탈한 결혼생활, 베이비 붐 시대가 이 땅의 가임 여성에서 부과한 역사적 사명인 양 대책 없는 다산, 화목한 가정, 남들은 다 팔자 좋다고 알아주는 이러한 결혼 생활이 문득문득 나를 힘들게 했다. 속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겉만 빌려 입은 비다옷으로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처럼 자신이 한없이 뻔뻔스럽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6.25는 그에서 학자의 길만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휴전선은 고향땅을 밟지 못하게 했다. 비로소 남북 화해 무드로 개성 관광을 하게 되었을 때 지척에 있는 고향마을 ‘박적골’에 다녀오고 싶었다. 하지만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 고 씁쓸히 고백하기도 했다. 그가 고백한대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은 아픔을 주었지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정지용의 시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는 아지랑이 마냥 피어오르며 그의 문학세계에 부드럽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의 대표작은 전쟁에 대한 절절한 체험과 6.25 당시 자신의 가족사를 쓴 작품이며, 문학적으로 가장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결국 6.25는 작가에게 가보지 못한 길을 선사 했지만 문학의 길로 가는 평생의 화수분이 되었던 것이다. 

 

못 가본 길은 항상 아름답다. 그것은 티 없는 사랑인 채로 기적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는 첫사랑으로, 누군가에는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일을 가지는 것으로, 누군가에는 어릴 적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완서에게는 자신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며 순수한 학자의 길이기도 했다. 못 가본 길을 바라보는 박완서는 아쉬움이 크겠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나 같은 범인에게는 너무도 아름다운 길일 아닐 수 없다. 평생토록 걸어온 그를 바라보는 범인의 마음에는 작가가 이룬 문학적 성취에 대한 질투에 가까운 동경이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 길을 걸어보고 싶다. 비록 길의 끝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쓰러져 다시 돌아오지도 못한다 해도 아름다운 길을 걸어 보고자한다. 짝사랑하는 뮤즈가 승자의 품에만 안겨있어 바라보는 것마저 고통스러울지라도 못 가본 숲을 향해 몸을 던져보고 싶은 것이다. 별만을 바라보던 시선을 땅을 걷는 이의 시선으로 내려본다. 목표가 있는 저 멀리 문학의 성이 아니라, 길의 여정에 있는 민들레와 코스모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걷고 싶다. 때로는 목적지까지 더욱 멀어진다 하더라도 히야신스의 향을 느끼며, 어느 날 내리는 소나기에 몸을 흠뻑 젖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렇게 걸어가다 동행을 만난다면 더욱 좋으리. 길을 잠시 벗어나 계곡을 찾아 같이 멱을 감아도 좋으리... 비록 그와 같은 작가가 될 수는 없다고 해도 내가 가는 길과 가지 못하는 길 모두가 나의 중심 저 깊은 곳에 있는 열정의 불길에 화목(火木)이 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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