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나의 땅에 건강한 나의 나무 키우기
-정영선의 『물컹하고 쫀득한 두려움』을 읽고
이유빈
‘은수’, 왜 이 이름이 나에게는 그렇게도 강하게 가슴 깊이 와 들어박혔을까? 읽을수록 내 모습과 닮은 그녀에게서 내면 깊이 내재해 있던 나의 또 다른 자화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처음 이 작품을 대할 때는, 매일 우리 주위를 스쳐지나가는 그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평범한 사춘기 소녀의 내적갈등이라고 치부하기에는『물컹하고 쫀득한 두려움』에서 은수가 느꼈던 아픔과 두려움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평범하지 않은 아픔과 두려움을 느끼는 이가 다만 은수뿐이겠는가? 어쩌면 ‘은수’는 또 다른 ‘나’를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을 읽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나에게 ‘은수’는 먼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낯선 이가 아니라,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단순히 사회적으로 도태되어 있으면서 힘든 생활을 이어가는 소시민의 자식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은 환경에 갇혀있으면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와 흡사한 존재였다. 동성애자인 엄마, 그로인한 부모님의 이혼은 은수가 터잡은 땅에 뿌리내리려는 한 그루의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땅을 뒤엎어 버린 형국이었다. 아주 비옥한 땅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극히 평범했기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도 있는 땅이었다.
그러나 가족의 해체로 은수가 딛고 선 땅은 지진을 만난 것처럼 갈라지고 허물어져버렸다. 뿌리내릴 땅을 잃어버린 은수는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낯설면서도 가까웠던 할머니의 반디국밥집이었다. 이 새로운 땅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 은수는 자신이 미처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고 있었던 ‘변화’를 인정하게 된다. 헌신적인 사회운동가였던 아빠의 변심, 정숙이모와 함께 사회 부정의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엄마의 상반되는 모습, 엄마의 연인인 정숙이모와의 묘한 관계 등을 알게 되니, 그동안 의아했던 환상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내가 중학교 1학년 2학기를 마치는 시기였을 것이다. 급격한 체중변화는 스스로를 자존감 낮은 사람으로 만들었고, 친구들과의 잦은 다툼으로 인해 학교생활에서도 난항을 겪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가족들의 ‘무관심’이었던 것 같다. 맞벌이로 언제나 늦게 귀가하시고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이 항상 부족했던 부모님에게 내가 겪고 있는 아픔을 말할 수 없었다. 4살 터울의 언니도 그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자기 나름의 힘든 점이 있었을 테니까, 나의 고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부모님과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됐다. 아마 내가 정말로 힘들었을 때, 부모님이 나를 외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반항하고, 더 삐뚤어졌던 것 같다.
이랬었던 내가 지금의 ‘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언니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언니는 고된 중학교 생활을 보냈던 동생이 걱정됐는지 문자를 보내왔다. ‘네가 정말 힘들 때, 언니가 말 한 마디라도 건넸으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을 텐데. 미안해.’ 그 문자를 보고 얼마나 울었던지. 아마도 그 때 나는,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었던 것 같았다. 그 문자를 받은 후, 나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고, 부모님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고등학교 생활도 순조롭게 이어갔다. 고등학교 3학년인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면 정말 단순하고도 평범했던 ‘변화’ 혹은 ‘갈등’이 왜 그렇게 나에게는 심각하게 다가왔을까 라고 생각하곤 한다.
여기서 나와 은수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새로운 ‘땅’의 출현일 것이다. 나 역시 은수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신념 또는 가치와 충돌되는 가정환경, 학교생활의 어려움으로 속칭,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그에 더해서 부모님, 친구들과의 갈등은 직접적으로 내 나무의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사춘기라고 부르기 싫었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 당시의 나는 어렸지만 주체적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나이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갈등으로 내 주위의 환경이 오염되고 땅이 황폐해졌을 때, 나는 은수처럼 새로운 땅을 찾을 수 없었다. 은수와 같이 가족이 분리되고 직접적으로 삶의 환경을 바꿔야하는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가 ‘땅’이 되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환경이 불안정해져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타인에 의지해서 나를 성숙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가 땅이 되고 뿌리를 내렸던 것이 오히려 은수와는 다른 환경이지만 동시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은수가 차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예전에 살던 집 앞에 술에 취한 엄마가 찾아온다. 엄마는 왜 그 지긋지긋했을 옛집에 다시 온 것일까. 아마 엄마에게는 그 집이 족쇄이면서도 안식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동성애, 그로인한 이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은수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혼란스럽고 두려웠던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자신의 일부이면서도 삶의 한 부분이었던 엄마라는 존재가 다른 의미로 은수에게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가까웠던 존재였기 때문에 더욱 ‘인정’할 수 없었던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은수는 자신의 내적변화를 실감한다. 나는 이러한 은수의 변화가 놀랍기만 하다. 만약 실제로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이제 가장 먼 사람이 되고,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삶을 살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은수처럼 그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타인의 삶에 관용을 베푼다는 표현은 전적으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 말 속에는 타인의 삶을 마치 자신의 전유물 마냥 인식하고 있는 자기중심적 사유가 개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삶의 방식이라도 ‘관용’을 베풀겠다는 표현은 온전히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도 은수처럼 타인의 인생을 인정하기 싫었으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만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혼란스러운 나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내가 원치 않던 상황과의 대면으로 인한 반항심은 항상 나를 타인에게 적대시하게 만들었다. 누구와의 접촉도 원치 않았고 불안정한 심리상태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형성도 원활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국 나도 은수처럼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까지 회피했기에 나온 행동이었던 것 같다. 은수가 엄마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엄마의 부끄럽지 않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성숙해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초월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찾아나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일을 경험하고 무너진다. 하지만 그 상황에 최선을 다한다면, 어느 누구도 무너짐을 마지막 결과로 안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변화를 거부하고 회피했던 은수가 새로운 땅에 적응하고 뿌리를 내리면서 이제는 서서히 어엿한 나무로 자라고 있었다. 엄마의 인생도, 아빠의 인생도, 할머니의 인생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토록 징그럽고 거부감이 들었던 돼지국밥 살코기를 먹을 수 있었다. 스스로가 변화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 가장 가까우면서도 멀었던 그 돼지국밥 살코기를 먹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은수가 돼지국밥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버팀목이 필요했던 ‘아이’에서 스스로 설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무엇일까.
세상은 법적으로 규정한 성인의 나이에 도달하면 어른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의 정의는 조금 다르다. 순전히 나이를 기준으로 한 현대의 어른이라는 개념은 정신적 성숙도가 향상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 법적으로 청소년이라고 규정되는 미성년자는 정신적 성숙도가 낮은 상태인 것일까. 그것 또한 잘못된 통념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물컹하고 쫀득한 두려움』의 은수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의 병을 극복한다. 이로 통해 아픔과 두려움에 직면하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인간은 모두 무언가에 바동거리고 있다. 나이가 어리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개인의 아픔과 두려움의 무게가 다른 것은 아니다. 튼튼한 나무는 성숙한 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성숙한 뿌리는 나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 삶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사람들 나름의 가치와 이해가 나름의 뿌리를 만들고 각자의 나무를 키워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른’으로 성장한 ‘은수’처럼 이해, 성숙, 배려, 인정을 가질 수 있다면 당연하게도 성숙한 나무로 자라게 될 것이며, 함께 성장하는 다른 나무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원동력으로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나만의 나무를 땅에 뿌리내려서 키우고 있다. 완벽한 인생을 설계하지도 못했으며 내가 원하는 삶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오늘의 계획도 없는 간단하지만 복잡한 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나는 스스로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나를 자극시키는 무언가를 찾아가기를 바란다.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사람들과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고, 그들을 이해,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혹시라도 나의 나무가 쓰러진다고 해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함을 가지기를 바란다. 아직은 ‘아이’라고 규정지어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황폐해진 토양에서 아직은 버팀목에 의지해서 버티고 있던 나무들이 깊이 자기 땅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하늘 향해 높이 솟아 있는 건강한 나무가 되어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나와 비슷한 시간대를 살고 있는 모든 젊은이들이 은수처럼 정금같이 단련되는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여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길 빌어 본다.
Chapter
- 제2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당선자 발표
- 대상(일반부) - 양지영 / <흉터의 꽃>을 읽고
- 대상(학생부) - 이유빈 / <물컹하고 쫀득한 두려움>을 읽고
- 금상(일반부) - 이상미 / <영초언니>를 읽고
- 금상(일반부) - 장수민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고
- 금상(학생부) - 금소담 / <꿈을 요리하는 카페>를 읽고
- 금상(학생부) - 변희주 / <빨간 나무>를 읽고
- 은상(일반부) - 이동택 / <나를 변화시키는 좋은 습관>을 읽고
- 은상(일반부) - 정유진 / <자존감 수업>을 읽고
- 은상(일반부) - 조영남 / <여행하는 인간>을 읽고
- 은상(학생부) - 오세영 / <안 읽어씨 가족과 책 요리점>을 읽고
- 은상(학생부) - 전대산 / <아몬드>를 읽고
- 은상(학생부) - 최다은 / <열일곱 살의 털>을 읽고
- 동상(일반부) - 강나리 / <아무것도 아닌 지금은 없다>를 읽고
- 동상(일반부) - 김영혜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고
- 동상(일반부) - 서유경 / <영초언니>를 읽고
- 동상(일반부) - 정원주 / <야행>을 읽고
- 동상(일반부) - 조영진 / <호모데우스>를 읽고
- 동상(학생부) - 김명우 /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 동상(학생부) - 박세아 / <땅이 통곡하는 한>을 읽고
- 동상(학생부) - 윤도완 / <꿈을 요리하는 마법카페>를 읽고
- 동상(학생부) - 이형준 / <슈퍼 암탉 치키>를 읽고
- 동상(학생부) - 정다혜 / <내 친구 맹자의 마음 학교>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