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초언니‘를 읽고
-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하여...
이상미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護憲)조치로 전국이 들끓었던 1987년 무렵의 나는 뚜렷한 역사의식 없이 시류(時流)에 휩쓸려 다니는, 그저 평범한 대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호기심이 발동해 한두 번 동참했던 학내시위에서도 이런 상황을 유발한 원인과 책임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한 발짝 비켜서 있던 철저한 방관자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시간에 맞추느라 학교 운동장을 허겁지겁 가로지르던 중에 어디선가 울리는 날 선 비명소리를 들었다. 예사롭지 않은 그 소리에 이끌려 달려간 곳은 종종 배고픔을 해결하곤 했던 문과대 식당 앞. 눈에 익은 풍경 속 웅성대는 학생들 사이에는 시커먼 주검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은 충격적이라기보다는 너무 낯설었다. 곧이어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앵앵거리자 비로소 나는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현실의 공간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라 안 여기저기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었지만 나에겐 그저 뉴스거리에 불과했던 분신(焚身)의 흔적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된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의 눈물은 문과대 옥상에서 날려 보낸 망자(亡者)의 마지막 혈서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 젊은이의 절망과 마주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더욱이 그의 아픔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더욱 아리고 쓰라렸다.
다음 날 일간신문에서 <어느 지방대생,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이라는 겨우 한 단짜리 기사로 그의 죽음은 매몰되고 말았다. 그는 고문과 최루탄에 스러져간 박종철도 이한열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였다. 커다란 가방에 책 대신 화염병을 챙겨들고 직선제 개헌을 약속한 6․29선언을 이끌어 낼 때까지 가두시위에 나선 것이. 그것은 같은 대학 학우를 이름 없이 죽게 만든 나 자신을 비롯한 우리 모두의 무능함에 대한 질책 때문이었고, 또한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고인이 지키고자 했던 것들에 대한 경외심(敬畏心)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투쟁이력은 거기까지였다. 이념과 사상이 뒷받침되지 못한 실천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뜨겁게 불사르진 못했지만 아름다운 열망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로부터 아득한 시간이 흘러 이제 하늘의 뜻까지도 알 수 있다는 나이에 이르렀다. 문득 무엇을 위해 그토록 내달려 왔을까 되뇌어보게 된 이즈음,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도서관에 들렀다 집어든 책이 바로 <영초언니>였다. 표지의 맑은 수채화가 인상적이었고, 오래 전 읽었던 <몽실언니>와 같은 애틋한 정서가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책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애초에 기대했던 느낌은 간 데 없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대변되는 상실의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쳐온 영초언니의 서글픈 민낯만이 남았다. 나는 오랜만에 그리움이 아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과 또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박정희키드’였던 서명숙이 고려대 76학번이 되면서부터 세상에 눈을 뜨게 되고, 그것이 영초언니로 인해 구체화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듯 쉽게 풀어 낸 우리 선배 세대들의 투쟁기다. 지금은 초등학교가 되어 버린 국민학교 시절, 애통한 표정으로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준 이웃집 아저씨와 흑백텔레비전 속에서 땅을 치며 가슴을 쥐어뜯던 하얀 소복의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그 모습을 보며 하루아침에 이십 여 년 가까이 모시던 군주(君主)를 잃어버려야만 했던 백성들의 절망감이 어린 나에게도 오롯이 전해졌는지 함께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도 ‘박정희키드’였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을 줄줄 외어대면서 말더듬이를 극복했던 명숙은 누구보다도 열렬한 ‘박정희키드’였다. 공화당 시장조직책이었던 엄마의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자신에게 자존감을 심어준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절대자에게 지지를 보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던 그에게 대학은 국토의 남단 제주도에서의 무지몽매함을 일깨워준 또 다른 신세계였다. ‘가라열’이라는 모임에서 페미니스트로서의 가치관을 갖게 되었고, 영초언니를 통해 자신들을 도와줄 대학생 친구가 절실했다던 ‘전태일’도 알게 되었다. 또,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엄주웅’과 애틋한 사랑도 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던 밀실에서의 고초와 그 후에 이어진 구금생활에서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훼손당할 수 있다는 쓰라린 경험도 해야만 했다. 이처럼 대학 생활은 자신의 틀을 깨부수는 동시에 한껏 움츠러들게도 만들었다.
분노와 한숨으로, 더러는 쟁취의 기쁨으로 가득했던 대학생활이 끝나자 모두들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을 하면서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출판사의 간사로 새 길을 연 명숙과 달리 결코 평탄하지 않은 길을 택한 영초언니의 말로(末路)는 처참했다. 그것은 이타적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찬란한 청춘의 봄날을 함께 했던 영초언니의 몰락을 자기합리화를 통해 모른 척 했던 명숙의 뼈아픈 반성으로 끝이 난다. 그것은 세상이 변했는데 적당히 비비적거리며 살지 그랬냐며 비아냥거렸던 우리 모두의 뉘우침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초언니에게나 삼십 여 년 전 제 삶을 내던진 내 학우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다.
우리가 다른 시대에 태어나고 다른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결코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초언니가 부대낀 70년대의 치열함이 없었다면 내가 주변인으로 떠돌았던 80년대가 있을 수 없었고, 80년대의 그늘이 있었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내 아이들은 어느 정도 눈과 귀를 열어두고 살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을 만났다. 그러고 보면 집단이데올로기에 파묻혀 버렸던 내 젊음도 그리 억울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다만, 살아남은 자로서 그 때 좀 더 함께 나누고 보듬지 못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Chapter
- 제2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당선자 발표
- 대상(일반부) - 양지영 / <흉터의 꽃>을 읽고
- 대상(학생부) - 이유빈 / <물컹하고 쫀득한 두려움>을 읽고
- 금상(일반부) - 이상미 / <영초언니>를 읽고
- 금상(일반부) - 장수민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고
- 금상(학생부) - 금소담 / <꿈을 요리하는 카페>를 읽고
- 금상(학생부) - 변희주 / <빨간 나무>를 읽고
- 은상(일반부) - 이동택 / <나를 변화시키는 좋은 습관>을 읽고
- 은상(일반부) - 정유진 / <자존감 수업>을 읽고
- 은상(일반부) - 조영남 / <여행하는 인간>을 읽고
- 은상(학생부) - 오세영 / <안 읽어씨 가족과 책 요리점>을 읽고
- 은상(학생부) - 전대산 / <아몬드>를 읽고
- 은상(학생부) - 최다은 / <열일곱 살의 털>을 읽고
- 동상(일반부) - 강나리 / <아무것도 아닌 지금은 없다>를 읽고
- 동상(일반부) - 김영혜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고
- 동상(일반부) - 서유경 / <영초언니>를 읽고
- 동상(일반부) - 정원주 / <야행>을 읽고
- 동상(일반부) - 조영진 / <호모데우스>를 읽고
- 동상(학생부) - 김명우 /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 동상(학생부) - 박세아 / <땅이 통곡하는 한>을 읽고
- 동상(학생부) - 윤도완 / <꿈을 요리하는 마법카페>를 읽고
- 동상(학생부) - 이형준 / <슈퍼 암탉 치키>를 읽고
- 동상(학생부) - 정다혜 / <내 친구 맹자의 마음 학교>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