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6193

결혼 전에는 알랭 드 보통의 예방접종을 맞으세요

장수민

 

31세. 나는 결혼이 두렵다. 지금 같이 휘황찬란한 보름달이 뜬 명절에는 더 더욱. 나는 추석 연휴인 어제도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들과 소맥을 달리고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집으로 들어와 그대로 쓰러져 잠을 잤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시 일어나보니 아침 7시였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둘이서 이건 버리니 마니 사부작거리며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있었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남동생이 해장 겸 점심으로 직접 만든 까르보나라를 내 주었다.
-우린 벌써 먹었어 휘핑크림 넣고 만들었다
-이야 죽인다 야 조금 있다 스파랜드에 가서 몸이나 풀자
파스타를 말아 입에 넣으며 요란하게 울리는 카카오톡을 들여다보니 나의 늘어진 팔자와는 반대로 각종 전을 부치고 하루종일 설거지를 하느라 진이 빠진 친구들의 하소연, 새벽부터 일어나 차례를 지낸다는 남자친구의 문자.

나는 남자친구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그 어떤 상황적 사회문화적 가족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순도 100%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자친구는 장손이며, 격 달에 한 번 제사가 있고, 창원에서 일하지만 부산의 본가로 야근 중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 와서 다시 야근을 하는 전통적인 집안의 자녀이다. 남동생과 아버지가 청소며 요리를 해 주고 명절에는 온천에나 가는 팔자가 늘어진 나와는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5년 째 사귀는 이유는 내가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남자친구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결혼’의 문턱으로 넘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결혼이 핑크 빛만이 아닌 것은 알지만 어떻게 하면 결혼 후의 일상을 잘 보낼 수 있는지, 도대체 결혼 후에 생기는 갈등이란 건 어떤 것들인지 구체적으로 애기를 들은 바가 없었다. 이혼만이 해결책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결혼으로 한 걸음 더 나가지 못하고 있던 나는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었다. 마치, 아직은 해본 적 없는 결혼생활에 대한 예방접종을 맞은 듯 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읽던 동화의 마지막 장면은 하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남녀 주인공이 결호식장으로 들어가던 장면이었다. 그것은 사랑의 결실, 해피엔딩이다. 해피엔딩? 정말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100년 동안의 수면에서 깨어나 왕자를 만나 결혼했을 때, 공주는 100년이 지나버린 시간과, 자신이 아는 그 누구도 살아있지 않다는 불안, 이 왕자가 어디의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이 한 사람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독립적이지 못한 삶 속에서 과연 행복할까? 그래도 동화는 행복해 보이는 공주의 얼굴과 흰 드레스로 마무리된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에서 라비와 커스틴이라는 연인의 첫 만남부터 불타는 밤과 사랑, 결혼, 갈등, 깨달음과 성숙까지 모두 보여주고 있는데, 낭만적 연애는 2할, 그 후의 일상은 8할 정도 차지한다. 물론 외국 소설인지라 명절노동과 같은 결혼 후에 생기는 우리나라 전통-이면서 고통-의 모습은 없지만, 라비와 커스틴이 쩔쩔매는 육아의 모습, 사소해 보이는 언쟁과 다툼만으로도 연애 이후의 일상이 이렇게나 힘든 것임을 깨달았다.

결혼은 어떠면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자라오고 행동하는 방식은 결혼 이후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갈등의 씨앗이 될지도 모른다. 각자의 가족의 문화와 방식대로 자라온 라비와 커스틴은 그들으 받은 양육방식에 맞게 인격이 형성된다. 낭만적 연애의 이후 일상을 함께 하면서부터 드러나는 각각의 상처, 그 상처를 표출하는 방식은 너무나 달랐다. 그걸 해결해 나가기 위해 그들은 책의 말미에 부부상담을 받게 된다. 커스틴의 경우 갈등이 찾아오면 그것을 회피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는 사람이었고, 그 점이 나와 너무나 비슷했다. 아마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커스틴처럼 짜증을 내고 행복하게 되겠구나 싶었다. 사랑 하나만으로 결혼했던 라비와 커스틴, 그들은 그 후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사랑과 열정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랑을 이루는 구성요소 중의 하나가 열정일 뿐이며, 그 동안 우리는 열정이라는 것이 모든 현실을 이겨내 준다는 마법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열정만 강요하는 낭만주의는 버리고 그 이후의 삶을 사는 리얼리즘으로 갈아타자.

나는 이 책을 남자친구의 차 뒷자석에 올려놓았다. 아직 내가 입장하지 못한 결혼이라는 차원은 두렵지만, 남자친구와 내가 살아온 환경이 너무도 달라 그 온도차를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렵지만, 이 책을 읽고 서로의 다름, 서로의 삶을 잘 이해하고 한층 더 성숙한 자세로 결혼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는 조그만 희망이 생겼다.
-너도 꼭 읽어봐.
남자친구는 아직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읽고 나면 우리 결혼할까? 하고 말을 꺼내려 한다.

Chapter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