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6177

‘언어’의 마경에 덮인 상식의 틀을 깨버린 환상과도 같은 작품, ‘야행’

정원주

 

 서점 진열대의 수많은 책들 중 대낮의 고속도로에서 눈앞에 마주한 새까만 터널처럼 나를 빨아들일 것만 같이 유독 내 시선을 강하게 이끌었던 눈부시게 밝은 조명아래 검정 표지의 ‘야행’. 작가 소개를 읽으며 매직리얼리즘이란 생소한 단어를 접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책을 붙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뭔가에 홀린 듯 계산을 한 후 발걸음을 근처 카페로 옮겨 주위의 환경에 눈과 귀를 모두 닫고 오로지 책에만 집중하며 한 권을 완독하였다. 작가의 필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도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허구적이기도 하여, 책을 읽는 내내 작가가 이끄는 대로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의 이정표를 따라갔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나는 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는 이내 “아!”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평소 나의 애독서 중 하나인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란 책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사실적인 배경아래 평범한 회사원이 바퀴벌레로 변신하는 내용의 그 책. 나는 중학생 시절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의 혼란과 지금의 혼란이 같은 감정이란 것을 깨닫고 곧 평정을 되찾았다.
 ‘야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매직리얼리즘 그 자체였다. 기시다 미치오라는 동판화가의 연작인 ‘야행’과 관련된 주인공 일행들의 여행담, 그리고 ‘현재’와 ‘과거’, ‘밤의 세계’와 ‘낮의 세계’를 자유로이 드나드는 방식으로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문체는 마치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대단한 마술사의 마술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있는 와중에는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전개방식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만큼 작가의 서술 기법은 교묘했고 섬세했으며 치밀했다.
10년전, 영어회화학원 동기들과 함께 구라마 진화제를 보러 갔다 일행 중 하세가와라는 여자가 실종이 되었고, 주인공 오하시가 10년만에 하세가와를 제외한 일행을 다시 한 자리에 불러모아 구라마 진화제를 보기 위해 여행에 나서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오하시를 포함하여 나카이, 다케다, 후지무라, 다나베가 각각 여행지에서 겪었던 기묘한 사건들과 기시다 미치오의 동판화에 대한 추억을 풀어냈고 개개인의 이야기 속에서도 절묘하게 과거와 현재 시점이 교차되면서 책은 나의 상상력을 점점 더 자극했다.

“세상은 언제나 밤이었어.”

매 챕터마다 반복되던 대사였다. 결국, 이 책의 진짜 배경은 ‘야행’이 존재하는 세계였을까, ‘서광’이 존재하는 세계였을까. 두 세계는 실제로 나란히 공존하고 있고, 기시다 미치오의 작품이 그 둘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했던 것일까. 나는 후자의 명제에 마음이 기울었다. 현재의 세계를 사는 데에 지쳐버린 오하시의 다른 세계를 향한 강한 열망이 그의 상상 속에서 ‘기시다 미치오’라는 기묘한 동판화가를 만들어 냈고, ‘야행’과 ‘서광’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밤의 세계와 낮의 세계를 구분 지음과 동시에 그의 기묘한 작품을 평행한 세계로의 이동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던 것은 아닐까. 오하시가 보고 만났던 ‘기시다 미치오’는 ‘기시다 미치오’가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하세가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로 인한 오하시의 현실 세계에 대한 애증이 만들어낸 ‘기시다 미치오’라는 가상의 인물이 실존하는 어느 동판화가의 위로 마경처럼 오버랩되어 두 세계를 오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하세가와 역시 어떠한 일을 계기로 오하시보다 10년 먼저 이것을 겪고 ‘서광’의 세계에 정착한 인물은 아니었을까… ‘야행’의 세계에서 하세가와를 잃어버린 10년 동안 오하시의 10년은 분명히 실재했고, ‘서광’의 세계에서는 오하시가 실종된 10년 동안 하세가와의 10년도 틀림없이 존재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고, 두 세계의 다른 인물들은 각각의 세계에 이중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사는 세계는 어떤가.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내가 살아내고 있는 이 세계와, 지금의 내가 잠든 시간 어디선가 다른 세계를 살아내고 있을 ‘나’. 그 세계의 ‘나’는 지금의 내 존재를 알까. 아니 이 세계의 존재를 알까. 흑백이 반전되듯 같은 시간, 같은 배경아래 다른 경험을 쌓아왔을 ‘나’의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 곳의 ‘나’는 자신이 진짜일 것이라 생각할 테고 이 곳의 나는 당연히 여기가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두 세계 모두에서 탄생 후 29년이라는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고 어느 쪽의 시간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딱 한 번뿐인 아침ㅡ”

우주라는 공간 안에 얼마나 광활하고 무수히 많은 세계가 존재할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세계의 나에게 충실하며 내일이라는 시간에 존재할 딱 한 번뿐인 아침을 기꺼이 맞이하려 한다.

Chapter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