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영광독서 감상문

영광도서 0 6876

 

열정과 깨달음- <미쳐야 미친다>을 읽고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이용호

 

  

 

'어떤 교육철학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가?' 

답을 찾으려 애써 보지만, 결국 내게 가장 두려운 질문임을 깨닫고 만다. 4년차. 가르침의 길로 들어서 선생 노릇을 한지도 벌써 4년째이다. 신임도 아닌, 고참도 아닌 어정쩡한 년수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는 척 해야하는 4년의 시간은 내게 많은 변화를 안겨 주었다. 

 

결혼과 첫 아이의 출산. 가르침은 이미 꿈이 아닌 직업이었다.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만(萬)의 자리에서 조막만하게 몸부림치는 본봉은 나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강남에서 과외하며 나의 월급의 3배를 더 번다는 대학동기 소식에 배 아파하며 학교생활에 지쳐갔다. 선배교사에 대한 실망과 학교 행정에 대한 불만도 더욱 깊어져 무관심과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하지만 그 정도는 참을만한 것이었다. 내가 교사가 아니라 회사원이었더라도 소속 집단에 대한 불만은 충분했으리라. 문제는 학생들과의 관계였다. 

 

내가 몸 담고 있는 학교는 시골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이다. 도시의 아이들보다는 많이 모자란 학업 성취. 학생들이 언제나 힘들어하는 수학을 가르치는 나로서는 정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수업을 한다. 올해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을 맡았다. 하루하루 줄어드는 D-day 만큼이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수험생임에도 불구하고 게임, 만화, 휴대폰에 미친 녀석들. 수학은 이미 주요과목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수업 속에서 결국 나는 절망이란 이름으로 학생들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포기는 교사로서의 회의를 안겨주었다. 가르침에 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스스로의 평가는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에 갈망했는데, 그것이 가르침이었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슬픈 일이다. 이미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내 인생은 깊숙히 전개되고 있다. 어느날 아침 신문을 뒤적이다가 책 한권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미쳐야 미친다>. 

이해되지 않는 제목에 웃음이 나왔다. '미친다'의 반복. 학생들이 공부 외의 것에 미쳐감에 따라 나도 학생에 대한 절망과 교사로서의 회의로 미쳐감을 말하는 것 같았다. <미쳐야 미친다>를 손에 쥐고 첫장을 넘기며 눈에 마주친 '불광불급(不狂不及)'은 나를 강하게 흔들었다. '불광불급, 불광불급, 불광불급, ...' 반복해서 입 안에서, 머리속에서 되뇌어본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과연 나는 무엇에 미치지 못해서 미치지 못하였는가? 그 답을 찾고 싶었다.

 

꽃에 미친 김덕형의 열정. 나도 그런 열정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교사가 되겠다는 꿈은 나의 맹목적이 목표였다. 대학 4년동안 수학을 전공하고, 부족한 마음에 대학원까지 진학하였다. 그 어디서라도 날 부른다면 달려가서 가르침을 행할 태세였다. 때마침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게 되었다. 

 

집이 경기도 광주인데 부산으로 간다는 소식에 부모님과 친구들은 떠나는 순간까지 반대를 하였다. 어머니의 눈물도, 아버지의 한숨도, 여자친구의 애원도 내겐 그저 머리결 타고 흐르는 바람이었다. 내 머리속에는 '가르치고 싶다'라는 열정만 뿌리 박혀 있었다. 학교 전체가 울려퍼질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로 목 아픈 줄도 모르고 외쳐대며 수업하던 그 때의 열정. 큰 목소리 때문에 다른 반 수업에 방해된다고 지적당하면서도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벽(癖)으로써만이 전문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박제가의 말처럼 큰 목소리를 통해 내 열정을 불태워 전문가로서의 교사에 이르고자 했던 것 같다. 이런 열정이 있던 것이 불과 4년전이었다. 세월이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그 시간동안 열정이 어디로 사라지고 남은 흔적을 찾기도 쉽지 않은지 스스로 한숨이 나온다. 매번 가르쳐주고 강조를 해도 다음에 물어보면 여전히 모르는 학생들을 보며 던져진 교과서 만큼이나 내 마음도 던져진다. 

 

그 쯤되면 학생들도 나도 배우거나 가르치려는 의지가 꺽기고 만다. 나의 가르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말 희망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누군가 내게 충고해준다. 학생들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김득신의 독수기(讀數記)'는 그런 내게 깨달음을 주었다. 둔재라면 비웃는 주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니 오히려 대견스럽네. 하물며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하지 않았는가?'라며 아들을 두둔했던 김득신의 아버지 김치(金緻)의 교육관. 김치의 교육관은 교육학에 나오는 그 무엇도 아니다. 희망이다. 희망을 깨닫는다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가르치는 학생들이 절망적이라 생각하여 포기해 버렸었다. 스스로 포기하는 학생들에게 내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며 함께 포기했었다. 아, 이 얼마나 무서운 판단인가? 그 동안 나는 학생들이 '성실한 둔재'가 아닌 '뛰어난 천재'이길 바랬던 것이다. 즉, 학생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희망을 쉽게 버린 내가 진정한 교사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누군가 내게 '어떤 교육철학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가?'라고 물어온다면, 여전히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열정으로써 학생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가르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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