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영광독서 감상문 현상공모

영광도서 0 14523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읽고

- '냉소와 낭만 사이'를 부유(浮游)하다

                                                                                                                                                                                                                                                                       김정우

 

  2018년 9월. 수능을 두 달 앞두고 병원에서 의사 소견서를 떼서 학교에 병가를 냈다. 문제집과 참고서는 다 학교에 둔 채로 몸만 쏙 빠져나와 근 한 달 동안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 내렸다. 공부에 싫증이 나서가 아니었다. 내게 있어 2018년은 격변의 시기이자 과도기 속 병적 상태를 이겨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일 년 후 택할 전공을 문학으로 마음을 굳혔고 그건 양자물리학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충고 같지 않은 충고, 그네들이 퍼뜨리는 미래에 대한 공포심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얼룩져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러운 오물 속에서 나를 건져내고는 하얗게 색을 입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스스로를 외부의 적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색이란 덧칠하면 할수록 결국에는 어두워지는 법이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그런 세상에 맞설 무기를 갖지 못했다. 다만 낡아빠진 방패만 쳐들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나는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나를 세상 밖으로 퇴장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내게 한 달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사회적 고립을 자발적으로 감행한 나는 몇 평 되지 않는 방에서 책의 장막 속으로 나 자신을 숨겼다. 그런 시기에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를 우연히 접했다. 정말로 책의 한 구절이 사실인 것이었다. ‘모든 중요한 일의 결정적인 해결은 꼭 우연이 해준다.’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에서 우연히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무언가에 홀리듯 깊은 생각 없이 책에 대한 개괄적 내용도 보지 않고 서점에 들러 책을 집어 들었다. 책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어린아이가 주인공이라 하기에 일반적인 성장소설과 비슷한 부류의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마치 비무장 상태에서 안개가 자욱한 정적의 전쟁터를 홀로 걸어가는 군인의 입장에서 책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날아오는 무엇인가에 복부를 관통 당했다. ‘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이 문장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이었다. 이는 책의 프롤로그에서 나오는 한 구절이다. 열두 살 이후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다고 선포하는 그 말이 흔한 성장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구절이라는 생각과 함께 무언가 내가 책에 대해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을 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그 열두 살짜리가 가지는 사유의 깊이였다. 나는 처음에 그 아이가 그 목록을 지워버렸다는 데에 대하여 의아해했다. 애초에 그런 목록을 만들어내는 그 나이대의 어린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한층 더 높은 차원에서 그 목록을 지워내 버리는 결단을 내리다니! 나와 책 사이의 기나긴 줄다리기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프롤로그에서 책으로부터 기습을 당한 나는 한껏 긴장한 채 책을 넘겨갔다. 이상하게도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 진희에게 연민의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연민이라는 어휘 자체가 내리까는 듯한 뉘앙스를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저 진희라는 아이는 나와 마주 보고 서있으면 서있지 결코 내가 위에서 내려다볼만한 꼬맹이는 아니었다. 실상은 책을 읽는 내내 진희가 가늠할 수조차 없는 높이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설교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해야할 거 같다.
 
  책은 주인공 진희가 열두 살이었던 1969년을 배경으로 진희의 시점에서 주변에 발생한 사건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페이지가 넘어감에 따라 서서히 드러나는 진희의 냉소가 담긴 사유와 통찰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처음 정독할 때 책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가지지 않았다. 개별적인 사건과 전체적인 인생에 대해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부분에서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곰곰이 되새김질하며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책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키워드는 냉소와 유머이고 작가는 그 두 가지가 관통되어 지나간 사랑, 성(性), 인생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 세 지점에서 책을 처음 읽을 때의 나와 진희는 서로 양극단에 위치했었다. 그것들을 너무나도 하찮게 여기는 냉소적인 진희와 지나치게 심각하게 여기는 나. 마음속에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최고의 소설로 간직하고 있던 나에게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진다는 그녀의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반신반의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텍스트를 쏘아보며 페이지를 넘겼다. 책은 진희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교묘한 말로 읽는 우리를 꾀어내어 냉소의 표본인 진희의 인간 군상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여기에 진희의 이모인 영옥이란 인물의 변화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여 냉소가 가지는 매력을 한 층 더 끌어올렸다. 김영하 작가의 그 산문에서는 이 소설이 ‘당대의 센티멘털리즘과의 투쟁의 일환’이라고 소개되어있는데 진희와 영옥 사이의 관계에 이를 대입해보면 꼭 들어맞는다. 영옥은 센치함에서 벗어나 성숙함의 발로로 사랑과 삶에 대한 냉소를 택하게 된다. 그러면서 책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냉소적인 사람은 삶에 성실하다. 삶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언제나 자기 삶에 불평을 품으며 불성실하다.’ 어느 누가 이 모든 유혹을 쉽게 물리치고 꿋꿋이 출구까지 걸어갈 수 있겠는가.

  결국 나는 책과의 줄다리기에서 줄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하였다. 협상 끝에 영옥의 자리에 내 이름을 대입하여 다시 책을 읽기로 했다. 나도 영옥처럼 사랑과 그리고 삶에 대해 일종의 낭만을 품고 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깨트려 버려야 한다고 책은 나에게 거세게 주장했다. 확실히 이 책은 내가 냉소주의에 한발 내딛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맞다. 그러나 개츠비와 진희 사이의 광대한 간극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의 삶이 막대기를 기울이기만 하면 물리학적 법칙에 따라 양 끝으로 오고 가는 쇠구슬과 같다면 우리의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진희와 두 번 만남에도 확답을 선뜻 내어놓지 못한 나는 서서히 냉소와 낭만 사이의 균형점에 수렴되어갈 뿐이었다. 책이 내게 왜 냉소주의와 센치함 사이의 문턱에 서있냐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이렇게 답해본다. 나는 단지 작가가 어떤 삶의 방식을 묘사했을 뿐이라고 그것이 반드시 우리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어느 프랑스 작가의 말을 인용하며 변론을 펼칠 것이다. 물론 나의 이러한 태도에 책은 웃으며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물과 사람과 세상에 거리를 유지하는 진정한 냉소적인 자세가 아니겠느냐고. 결국 책과 나는 최종 합의를 보았다. ‘건강한’ 냉소를 택하겠다고.
 
  ‘건강한’ 냉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선 ‘문학적 치유’에 대해 고려해보아야 한다. 나는 문학이 주는 효용의 광범위함을 믿고 있는 편이다. 우리에게 지도를 던져주며 앞으로 우리가 걸어야 마땅한 삶의 길을 알려주는 책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등을 토닥이며 우리가 걸어온 삶에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주는 책이 있다. 언뜻 책의 저 두 모습은 배타적으로 보인다. 다만 나는 이 책에서 두 모습 모두를 만나볼 수 있었다. 내가 만일 인도하는 전자의 모습만 만났다면 책과 이 정도로 깊이 있게 교감을 나누지는 못했을 것이다. ‘치유’하는 후자의 모습을 잇따라 발견해낼 수 있었고 덕분에 평소 내심 바라던 ‘문학적 치유’를 받아볼 수 있었다. 다만 다소 엉뚱하게도 유머와 냉소로 가득한 이 책 『새의 선물』을 통해 문학적 치유를 받았다는 사실이 조금 의아하긴 하다. ‘치유’란 생물학적 병이라기보단 외부의 사회적 요인으로 유발된 병을 낫게 함을 뜻하는데 그것이 문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문학적 치유’이다. 여기서 ‘병’은 책을 둘러싼 거대한 사회 또는 그 책을 읽는 한 개인이 감내하고 있는 문제 상황으로 해석하면 좋을 듯싶다. 나의 경우는 개인의 단위에서 치유가 이루어졌다. 앞서 서술한 듯 올해 들어서부터 나는 삶에 대해 너무도 심각하게 생각해왔기에 나만의 세계를 너무 광대하게 구축해왔었다. 그런 병적인 상태에서 무의미한 덧칠만을 계속해오던 나에게 ‘우연’히 이 책이 다가왔다. 막대기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곧 떨어질 것 같이 위태한 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대신해서 그 막대기를 살짝 기울여 저 반대편 끝까지 넘어가지 않고 균형점에 위치하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냉소가 가지는 삶의 이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나의 병들었던 부위를 다듬어 내어 썩 괜찮은 존재로 조각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인도자의 모습에 뒤따라 나타나는 치유의 손길을 건네받을 수 있었다. 책은 결국 ‘중용’의 미덕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냉소와 낭만 사이를 끝없이 부유하는 삶. 그러면서 내게 냉소는 세상에 맞설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읽어낸 ‘건강한’ 냉소이다.

  책의 첫 장에 있는 프레베르의 시 「새의 선물」과 이 책 『새의 선물』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바로 ‘새의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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